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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ㅂ ㅏ ㄹ ㅐ ㅁ Jan 15. 2022

누구를 위해 누군가_

나다운 글 <고은-누이에게>


추운 날씨보다 더 차가운 마음을 가진 여자가 어두워진 밤길을 걷는다. 여자는 학비 마련을 위해 겨울 방학 동안 아는 언니 집에 머물며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했지만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비굴해져야 하는 엄마 모습이 더욱 싫은 그녀였다.


스물네 살 그녀는 아르바이트하는 호프집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그녀는 몸에 밴 친절과 성실로 사장의 신임을 얻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친근하게 느꼈다. 호프집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위치해 대부분의 손님은 가족단위로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어느 날 두 아이를 데리고 부부가 호프집을 찾았다. 아이들은 안주 중에서 간식이 될 만한 소시지를 주문해서 재잘대며 먹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부부는 시원한 생맥주잔을 부딪혔다. 여자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 한참을 바라보다 자신은 부모님과 한 번도 외식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족 손님을 바라보는 여자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때였다. 함께 일하던 직원 한 명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눈이었다. 직원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온몸으로 웃어 보였다. 여자도 따라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눈이 닿을 때마다, 쓰라렸던 마음이 희미해져 갔다.




방학이 끝날 무렵, 조촐한 환송회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나눠가지며 작별을 고할 때, 동료가 선물이 든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자정이 지난 시간 겨울밤은 더 깊게 짙어 있었다. 여자는 쇼핑백에서 선물을 꺼내 들었다.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시집이었다.

여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들었다.





누이에게 _ 고 은


이 세상의 어디에는

부서지는 괴로움도 있다 하니,

너는 그러한 데를 따라가 보았느냐.

물에는 물소리가 가듯

네가 자라서 부끄러우며 울 때,

나는 네 부끄러움 속에 있고 싶었네.


아무리 세상에는 찾다 찾다 없이도

너를 만난다고 눈멀으며 쏘아 다녔네.

늦봄에 날 것이야 다 돋아나고

무엇이 땅속에 남아 괴로워할까.


저 야마천에는

풀 한 포기라도 돋아나 있는지,

이 세상의 어디를 다 돌아다니다가

해지면 돌아오는 네 울음이요.


울 밑에 풀 한 포기 나 있는 것을 만나도

나는 눈물이 나네.


<시가 내게로 왔다_ 38P>




겨울밤의 감성 때문인지 시 때문인지 여자는 아무도 없는 겨울 눈길 위에서 울컥 눈물을 쏟았다.


시집은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시인들의 눈물이 응축되어 있었다. ‘소리 죽은 것들의 울음’ 그 울음은 여자에게 주는 위로였다. 현실적인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시집 선물을 받고 팍팍했던 마음이 녹아내린 것 같았다.


여자는 차가운 가슴을 데워준 시를 만난 후,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위로를 주는 시를 쓰고 싶어졌다.


해지면 돌아오는 누군가의 눈물 앞에 함께 울기로 한다.


유난히 긴 밤을 걷는 누구를 위해 누군가_ 




유난히 긴 밤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누군가 하는 기도 





#고은누이에게 #시가내게로왔다 #위로시집 #나다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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