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 토리노'
최근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단주의적 팬덤, 또는 정치지향성이 정치적 흐름과 정당의 움직임을 좌우하고, 정당 간은 물론 같은 정당 안에서도 서로를 적대시 하며 갈등을 빚기도 한다.
과거의 이념 간 충돌이 각자의 정의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기반했다면, 현재는 특히 권력 쟁탈전의 형태를 띠고 극단적인 이권과 명분 싸움으로 치닫는 듯 하다.
이런 상황들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어 이야기해볼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주연의 2009년 영화, '그랜 토리노'다.
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하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노인 월트는 얼마 전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내와 함께 살던 집, 개 한 마리와 그가 직접 만든 자동차인 1972년산 ‘그랜 토리노’ 뿐이다.
고집스럽고 거친 말투와 성격 탓에 전 직장 동료나 단골 이발사 정도의 지인은 있지만, 자식들과도 살가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아내는 죽기 전 한국전 참전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남편의 참회를 바라며 신부에게 남편의 고해를 들어줄 것을 부탁하지만, 월트는 신부의 계속되는 설득에도 참회할 것이 없다며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몽족 소년 타오가 갱단의 협박으로 월트의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갱단이 다시 타오를 찾아오자 월트는 그들을 내쫓아버리고, 이를 계기로 월트는 타오와 그의 누나 수, 그리고 다른 몽족 가족들과 점점 가까워진다.
월트는 백수로 지내던 타오에게 일자리까지 소개해주지만 갱단은 계속해서 타오를 괴롭히며 일도 못하게 방해하고, 월트는 갱단 중 한 명을 응징한다. 그러자 갱단은 타오와 월트의 집으로 찾아와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를 강간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월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 결심을 한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이 영화는 홀로 살고 있는 미국 노인과 아시아 몽족 계열 소년, 소녀의 우정을 그린다.
주인공 월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고 고립되어 살아간다.
두 아들과 손주들은 그를 괴팍한 노인네 취급을 하며 싫어하지만 이 또한 퉁명스러운 말투에 툭 하면 화를 내는 그의 성격에서 연유한다. 영화 초반부에는 이웃에 살고 있는 몽족 가족에게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내의 부탁으로 그의 참회를 돕기 위해 나선 신부가 친근하게 월트 씨라고 부르자 굳이 ‘코왈스키 씨’라고 정정하는 사람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행색이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의 터전에 유색인종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하다. 거리낌 없이 내뱉는 말들 중에는 인종차별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이처럼 무신론자에 인종차별주의적인 지독한 미국의 보수 노인인 그가 아시아에서도 소수민족인 몽족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우정을 쌓는다는 설정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는 월트가 몽족을 만나며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타오를 괴롭히던 갱들을 월트가 쫓아내자 몽족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대하며 각종 꽃과 음식들을 선물한다. 밀려드는 선물 공세에 당황한 월트는 거절하려 하지만 몽족의 전통에서 거절은 모욕이라는 말을 듣고 체념하고 만다.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했던 벌로 타오가 그의 집안일을 돕게 해달라는 타오 가족의 부탁 역시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대신 월트는 타오의 노동력을 자신이 아닌 주변 이웃들을 돕는데 쓰게 한다.
몽족의 파티에 초대됐을 때는 평소 무시하던 그들의 한 가운데 유일한 백인으로 섞여 있음에도 조금씩 적응해가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들과 어울려 즐기기도 한다. 그들의 끈끈한 모습에서 마치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애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혈을 계기로 찾아간 병원에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한 후 아들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은 그가 가족에게조차 마음을 닫았던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알고 보면 월트 역시 사실은 따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월트가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을 그의 본성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갇혀 있던 그의 겉모습을 깨고 스스로 내면을 솔직하게 꺼내 놓는 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월트는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아내는 그가 참회를 통해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그 스스로도 몇 차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언급한다. 특히 그의 살인은 명령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라는 신부의 말에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항복한 17세 소년병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끔찍한 기억 이후 그는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두 아들에게도 애틋한 부정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그가 몽족 소년과 쌓는 우정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몽족은 라오스 등에 살고 있던 동남아 소수민족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 서서 싸웠다. 하지만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미군은 몽족을 두고 그대로 철수해버렸다. 이후 몽족은 베트남 정부의 핍박을 받으며 뿔뿔이 흩어지고, 일부는 미국에 망명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몽족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월트와 이웃의 몽족 가족은 모두 외롭고 고립된 사람들이다. 월트는 미국 토박이지만 스스로 고립되어 있고, 몽족은 미국이라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들만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조화는 한편으로는 고립된 이들의 연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축으로는 전쟁으로 상처 받고 피해 입은 이들이 연대와 조화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백인인 월트는 미국에게 버림받은 몽족 가족으로부터 위안과 가족애를 느낀다. 그리고 몽족과 어울리고 몽족의 소년을 남자로 성장시키며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아간다.
마지막에 월트는 폭력으로 갱단을 응징하는 대신 자신을 희생하고 그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과 타오, 수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한다. 그리고 자신의 보물 1호인 그랜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이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면서, 동시에 희생을 통해 미국이 몽족에게 저질렀던 과오에 용서를 비는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던진 메시지는 진정한 보수주의와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가치를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어쩌면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수로서 정체성과 정통성을 지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념과 가치에 책임감을 갖고 서로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닐까.
타고난 보수주의자인 한국전 참전 용사와 베트남전의 희생자들이 우정을 나누는데, 하물며 한민족이며 역사의 아픔을 함께 견뎌 온 우리가 극단적인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리 없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