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돌풍'
국무총리 박동호. 그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으로 대통령 시해를 시도한다. 대통령은 혼수상태에 빠져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고, 박동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
여기에는 복잡한 상황이 얽혀있다. 검사 시절 재벌 수사를 하려다 윗선의 제지로 가로막히자 거물 정치인 장일준을 찾아간 박동호는 장일준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하지만 조금씩 타락한 장일준은 재벌과 결탁해 부정을 저지르고, 박동호의 두 친구인 재벌가와 싸우던 정치인 서기태는 거짓된 비리 혐의로 자살, 검사 이장석은 좌천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이에 분노한 박동호는 장일준에게 하야를 요구하고, 장일준은 정치보복으로 그에게 비리 혐의 누명을 씌운다.
한편, 장일준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경제부총리 정수진은 남편의 사모펀드에 부적절한 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그의 약점을 잡은 대진그룹 강상운 부회장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게 되고, 자신의 정치인생을 지키기 위해 대진그룹 수사에 목숨을 건 박동호를 저지하려 한다.
이런 각자의 복잡한 상황 속에 서둘러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한 박동호와 이전에 긴급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정수진의 싸움이 시작되고, 끝내 박동호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이번에는 정수진이 국회와 다른 국무위원들을 움직여 박동호의 권력을 무위로 만들려 한다.
당신이 무엇을 예상하든, 100% 맞추지는 못할 겁니다
올해 방영해 화제를 모았던 박경수 작가의 최신작 '돌풍'이다.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수 싸움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목적, 욕망을 위해 서로 싸우는데 그 수 싸움이 기가막히다. 한 두 개의 설정을 놓고 이것이 밝혀지느냐, 아니냐의 긴장감으로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 가는 여타 드라마와는 질이 다르다.
인물들은 상대의 약점, 또 다른 인물들과의 이합집산, 법과 인맥, 돈 등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끊임없이 수싸움을 벌인다. 상대가 걸어온 싸움을 또 다른 수로 받아치며 역이용하고, 이 과정에서 숨막히는 심리싸움이 반복된다.
사실 이전부터 작가는 엄청난 양과 퀄리티의 쪽대본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이 좋은 대본을 충분히 공부, 연습하지 못하고 촬영해야 하는 현실에 배우들이 빡치기도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는 넷플릭스. 사전 제작이다 보니 얼마나 더 완성도 높은 대본이 나올지 기대를 모았는데, 결과는 '역시는 역시'였다.
국가권력 최정점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전 드라마들보다 스케일도 훨씬 커졌고, 그들이 쓰는 무기도 훨씬 강력하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막아? 하는 생각이 드는데, 기어이 그것을 또 다른 무기로 엎어버린다. 심지어 그 템포가 굉장히 빠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수시로 허를 찔리고, 다음을 예상할 시간조차 없다.
사실 이런 드라마는 다음에 어떻게 될지 예측해보는 맛으로도 보는 건데, 아무리 드라마에 정통한 사람이라도 이 드라마의 다음 전개를 100% 예측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일반적인 드라마의 클리셰적인 문법을 거부하고, 말 그대로 예측불허로 상황을 몰고간다.
처음에는 라디오 광고 속 '제가 대통령을 시해했습니다'라는 박동호의 대사 하나만 듣고, 아무 정보 없이 드라마를 봤는데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그 진실을 추적하는 드라마일줄 알았는데 대통령 시해 사건은 3회차 내에 다 정리된다.
그 다음엔 대선으로 싸움판을 옮기는데, 이제 선거 싸움으로 본 게임인가보다 했더니 그 마저도 2회차만에 정리된다. 이제 전반부를 봤을 뿐인데 다음에는 또 어떤 판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빠른 전개 속에서 이들의 수싸움은 어마어마한 횟수로 등장하고, 진행되고, 해소된다. 그 와중에 빌드업도 탄탄해서 모든 상황이 설득력 있게 돌아간다.
이런 박경수 작가의 작품에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은 필수다. 빠른 전개의 긴박감을 리얼하게 느끼고 전달해야 하며, 인물들이 독대하거나 대치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카리스마를 다퉈야 하고, 그 자리에서의 승부는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결판이 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드라마의 캐스팅 역시 훌륭하다. 대립점에 있는 설경구와 김희애는 말할 것도 없고, 설경구와 함께 싸우는 김미숙의 차분한 카리스마는 '황금의 제국'의 반전 있는 카리스마보다 더 매력적이며 설득력있다. 빌런 역을 맡은 김영민의 연기 또한 악역 만들기에 일가견 있는 박경수 작가의 손을 타고 너무도 짜증나고 얄미운, 그리고 무서운 캐릭터를 완성한다.
한국 정치판에 대한 모두까기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당부분 현실 인물들과 겹쳐 보이는 면이 있다. 이것은 캐릭터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 상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박동호는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운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은 과거 운동권이었거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박동호와 다르지 않은 뜻을 품고 정치를 시작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불의와 타협하고 손을 잡으며 타락해간다.
사망한 대통령 장일준은 우리나라 역대 두번째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며, 임기 4년차 지지율이 50%에 육박한다. 대외적으로 민주 투사이자 인권변호사이며 청렴한 정치인으로 신망이 두텁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조차 여론의 벽에 부딪쳐 쉽지 않다.
그 비리 사건이 자신을 겨냥하게 될 것을 우려한 정수진은 이제 막 깨어난 장일준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그의 죽음을 장일준 아들의 검찰 수사를 정치공작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의 정치적 자산(장일준의 적자)을 쌓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박동호는 대선에 나서기 위해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당 경선에 나서는데 지지율이 여의치 않다. 압도적 지지율의 정수진을 그가 이길 방법은 없어보이지만,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수로 상황을 뒤집는다.
공안검사이자 수 차례 가짜 간첩 사건으로 범민주계열의 적으로 불리던, 그리고 현재 제1야당 보수 정당의 대선후보인 조상천의 힘을 빌린 것. 자신도 꽤 더러운 꼴 다 본 여당 중진 정치인 박창식조차 박동호의 선택에 멱살을 잡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정의를 위한다는 박동호가 스스로 싸움을 위해 신념을 버리기 시작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처럼 드라마의 인물들은 각자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어느새 권력의 한 가운데에서 타락해가는 인물들이며, 대외적인 얼굴과 다른 실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설정 틀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는 과정에 과거 특정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현대 정치판에 과감한 디스를 날린다.
옛날 정의를 부르짖던 자들이 지금도 정의로운지, 그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물음표를 던지며 또 한 번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회의를 이야기한다.
권력이 아닌, 몰락에 관한 이야기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박경수 작가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개별 인터뷰는 아니고 다수 매체에 대한 서면 인터뷰, 즉 보도자료에 가까운듯) 자신의 작품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사가 이런 멘트를 헤드라인으로 잡았다.
"내가 그리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몰락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흔히 이야기하는 그의 권력 3부작은 첫번째 작품인 '추적자 더 체이서'를 제외하면 악과 싸우다 결국 본인도 몰락한다.
추적자의 경우 재벌과 권력이 결탁한 한 집안을 상대로 싸우는 소시민의 모습, 그리고 통렬한 복수가 주 내용이었다면, 황금의 제국은 재벌가와 자본주의, 펀치는 우리 사회의 권력 핵심부이자 최고의 엘리트집단으로 불리는 검사들의 타락을 그렸다. 그리고 주인공은 어떻게 살아왔건, 어떻게 싸웠건 몰락했다.
이번 작품 돌풍은 '황금의 제국'과 '펀치'가 상징하는 재력과 권력의 힘이 하나로 뭉친 그야말로 끝판왕의 싸움을 다룬다. 그래서 이들의 카르텔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휘되며, 왜 우리는 그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너는 늪에 빠졌다,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마라
"너는 늪에 빠졌다. 살려달라고 손 내밀지 마라. 그 손 잡은 놈도 같이 빠질 것이다.
도와 달라고 비명 지르지 마라. 그 소리 들은 놈도 똑같이 다칠거다."
박경수 작가가 원래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대사들을 많이 쓰지만, 이 드라마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것이었다. 대통령 장일준이 자신의 오른팔이자 영혼의 동지와 다름없던 박동호에게 누명을 씌우며 한 그 대사.
작중 장일준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높은 국민적 지지율을 얻을 정도로 성공한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비리 세력과 결탁하고 자신을 위협하려 드는 정치적 동지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렇다.
이것은 재력과 권력이 합치된 사회에서 그들과 싸워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들의 카르텔이 어떻게 사람을 옭아매는지 그 핵심을 꿰뚫는다.
정수진마저도 그랬다. 원래 악과 결탁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편이 강상운에게 약점을 만들어주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끼자 차라리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힘을 모아 당신, 아니, 당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압박하고 위협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손을 잡거나 스스로, 먼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그들의 응징은 너무도 강력하고, 나도 모르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내가, 당신이 박동호여야했어. 부끄럽다, 내 젊은날이.
그런 의미에서 정수진이 한 대사는 작중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전대협 의장으로서 한때 잘 나갔던 남편. 하지만 그는 다른 동지들이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할 때 몇 번의 선거 패배를 겪고, 결국 정치가 아닌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냥 건실한 사업가였으면 좋으련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냥 반성하고 마음을 접는 평범한 사람이면 좋았으련만, 마지막 자존심을 놓지 못하고 남들 앞에 큰 소리 내는 인물이 되고 싶어서 결국 그는 모든 비극을 만들고, 감당하게 된다.
모두가 위험해질지 모르니 사모펀드 회사의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는 아내의 부탁에 그는 전대협 의장이었던 나는 지금 무엇이 남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수진은 왜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묻는다. 누구보다 세상이 변하길 바랐고,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해온 우리였는데, 왜 지금 우리는 비리에 얽혀 타락했는가. 왜 우리는 지금 박동호가 가는 길을 가지 못하는가.
수진의 비극은 박동호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박동호가 되지 못한 현실에 있는 것이다.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다
문제는 박동호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이 들어왔다. 악과 싸우기 위해 나조차 악, 괴물이 되지 말자. 하지만 이처럼 가혹하고 치밀하고 잔인한 악의 세계에서 그들과 싸우려면 올바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박동호는 결심했다.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더럽게 싸우겠다고.
그리고 그의 길은 정말 더럽게 펼쳐졌다. 그는 물론, 그가 속한 정당(민주화세력)에서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수구 세력(고문, 간첩단사건 조작 검사)과 손을 잡고, 친구이자 정의로운 검사인 이장석에게 누명을 씌우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결정적 배경이었던 재벌 세력과 협상을 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첫 걸음, 정수진을 잡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정수진 또한 순서만 다를뿐 그런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길을 차근차근 독하게 밟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악에 얽혀, 또는 악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 결국은 진짜 불의를 고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찾기도 전에 서로를 죽이는데만 혈안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나락으로 처박힌다. 박동호는 정수진을 끝장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정수진은 두 명의 대통령을 시해한 죄로 감옥에 간다.
나도 모르게 늪에 빠진 자와 불의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늪에 들어간 자의 허무한 최후다.
그 과정은 정말 눈 뜨고는 못볼, 하지만 머리로는 너무도 흥미진진한 각종 음모와 거짓과 협작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또 너무도 극적이어서 현기증이 나고, 충격적이고, 멀미가 날 것 같다. 하지만 그 멀미의 증거로 나오는 헛구역질은 단순히 드라마의 속도감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루는 추악한 현실에 대한 거부감에 가까워 보인다.
박경수 작가의 작품들은 항상 고구마를 먹인다. 그런데 고구마를 채 씹어 삼키키도 전에 또 사이다를 던진다. 그러다 또 사이다를 삼키며 겨우 고구마를 씹어 넘길만 하면 또 다른 고구마를 먹인다. 도무지 부담스럽고 먹먹하고 답답하지만, 고구마도 사이다도 맛있고 제때제때 니즈와 긴장을 채워주니 또 한참을 즐기게 된다.
그러다 마지막, 그 허무의 순간(그가 쓴 대부분의 드라마가 주는 그 허무감) 그 동안 먹은 고구마의 체끼와 사이다의 쓰라림이 한 번에 몰려온다. 어쩌면 그는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근데 어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나조차 그런 비관론에 휩싸이고 마는 것을.
*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