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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5. 2024

이것은 의를 위한 싸움

영화 '한산: 용의 출현'


1592년 4월,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단 15일 만에 왜군에 한양을 빼앗기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조선을 단숨에 점령한 왜군은 명나라로 향하는 야망을 꿈꾸며 대규모 병역을 부산포로 집결시킨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연이은 전쟁의 패배와 선조마저 의주로 파천하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조선을 구하기 위해 전술을 고민하며 출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앞선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거북선의 출정이 힘들어지고, 도면 등 거북선의 정보가 왜군에 넘어가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왜군은 연승에 힘입어 그 우세로 한산도 앞바다로 향하고,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운명을 가를 전투를 위해 필사의 전략을 준비한다.


1592년 여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이 시작된다.



‘최종병기 활’과 ‘명량’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국내 사극 영화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시리즈 3부작 중 2번째 작품, 한산:용의 출현.


1761만명이라는 엄청난 흥행으로 역대 관객 수 1위를 기록한 전편 ‘명량’ 이후 8년 만에 개봉해 코로나 시국에서도 726만명이라는 높은 흥행 기록을 세웠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3부작에 해당하는 모든 작품에 주인공이자 상징적인 인물인 이순신 역으로 각기 다른 배우들을 캐스팅했는데, ‘명량’은 최민식, ‘한산’은 박해일, 마지막 ‘노량’은 김윤석으로 라인업이 이어진다.


임진왜란은 물론, 우리나라의 전쟁사 전체를 통틀어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대첩.‘한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바로 그 해, 순식간에 몰락의 위기에 놓인 조선을 구한 역사적인 대전 그 ‘한산대첩’을 배경으로 하여, 3부작 중 시간상 가장 첫 번째 사건을 다룬다.


때문에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들에 비해 다소 젊은 나이의 박해일이 캐스팅됐으나 그래도 이순신 장군 하면 떠오르는, 노장의 강인하면서도 번뇌에 찌든 이미지를 생각할 때 미스캐스팅이 아니었냐는 우려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간 다양한 작품에서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그답게 이번에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는 이순신 역을 맡은 박해일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많은 유명 배우들이 등장한다.


많은 장수와 병사, 그리고 민초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각자 위치에서 겪는 고민과 위기, 고통을 다루는 사극 전쟁영화의 특성상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메시지적 측면에서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는 배역으로 낯익은 배우들이 대거 투입되는 장면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임금도 버린 나라, 민초들은 왜 목숨을 바쳤나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를 꼽자면 일본군이었지만 항복해 조선의 편에 선 ‘항왜’ 준사와 이순신의 대화를 들 수 있겠다.



조선군의 포로가 된 준사는 이순신에게 묻는다.

"대체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이에 이순신은 답한다.

"의와 불의의 싸움이지."


당연하게도 의는 조선을, 불의는 일본을 뜻한다. 이순신이 답한 그 한 마디는 준사가 조선의 편에 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동시에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으로 전국시대가 막을 내린 일본. 출세를 위해 무사가 되고 전쟁을 벌이던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먹잇감이 필요했다.


즉, 일본의 침략은 강자로서 약자의 것을 빼앗고 그 위에 군림하는 전국시대의 습성이 더 큰 전쟁으로 확장된 욕망의 전쟁이었다.


반면 조선은 수천번에 이르는 외세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익을 위해 타국을 침공하지 않던 나라였다. 개인의 영달과 출세, 욕망을 위한 침략자와 오로지 민족의 생존을 위해 그들에 맞서는 피해자의 전쟁, 이를 이순신은 한 마디로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표현한다.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가고, 힘없는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왜군에 밀리는 상황.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에 놓인다.


한산대첩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의 국면을 뒤집어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시점과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상황을 연결하고, 그 안에 조선과 일본의 다양한 인물들을 녹여내 보여준다.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안성기는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는 노장을 맡고, 아이돌 출신 배우 옥택연은 밀정 임준영 역을 맡았다.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며 여러 영화의 주연으로 성공한 주목 받는 배우 김향기는 임준영의 아내이자 기생으로 신분을 숨기고 왜군의 정보를 캐는 첩자 정보름을, 범죄도시 시리즈를 통해 많은 인기를 얻은 박지환과 다양한 범죄물에서 악당, 형사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고 있는 김민재는 거북선을 개조해 한산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나대용과 이언량을 연기했다.


현재 주조연급으로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고 있는 이준혁은 의병 황박으로 분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다.


이 밖에도 원균 역할을 맡은 손현주와 왜군 장수 역할의 변요한, 김성균 등도 인상적이다.


한 영화에서 보기 힘들 것 같은 주조연급의 묵직하고 인상 깊은 배우들이 이 작품에서 다른 작품들하고는 비할 수 없이 짧은 시간 등장한다.


이는 장수에서 병사, 민초까지 한 명, 한 명 나라의 운명 앞에 목숨을 건 의로운 이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들 하나 하나가 소홀히 할 수 없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역사, 의로운 전쟁의 주인공인 것이다.


영화에서 왜군 장수들은 누가 더 많은 전리품을 얻을 것인가를 두고 눈치와 정치싸움을 벌인다.


물론 조선에도 일부 의보다 현실과 내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신분과 나이, 성별을 넘어 합심해 싸운다. 배역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열연을 펼친 배우들처럼.



의병 황박은 일본식 머리를 하고 있는 준사가 머리끈이라도 묶으려 하자 말리며 말한다.


"그딴 거 필요 없다. 의를 향한 마음, 그거 하나면 된 거지."


그들의 의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 당시의 의는 군사부일체를 기초로 하는 유교 철학에 기인해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내린 그런 것일 게다. 왕이 곧 국가인 시대, 왕이 백성의 어버이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의의 가장 기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 가치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칼의 노래 등에서 다뤄졌듯 이순신은 선조와 사이가 나쁜데다 의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군인으로서 한 사람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그 관점에서 이순신이 이 전쟁을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 일컬은 것은 너무 나간 거 아니냐고 볼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설정과 장치들이 결국은 스스로 의라고 믿는 가치를 향해 목숨을 던지는 이들의 숭고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라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도 생각된다.


어쨌든 하나의 의를 향해 나이와 성별, 심지어 국적까지 겉모습과 그것이 상징하는 수많은 '다름'을 초월해 자신을 내던진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지금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세상이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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