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멜로가 체질'
똘기 충만한 드라마 작가 진주, 히트작 한 편으로 벼락부자가 된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 대학 시절 하룻밤 사고로 아이를 갖고 결혼했지만 한 해만에 남자는 떠나고 홀로 일하며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 한주. 이들 세 명은 대학교 때부터 절친한 동기 사이로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한 우정을 자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은 은정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게 된다. 연인의 죽음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은정을 지키기 위해서다.
은정은 연인인 홍대가 시한부로 생을 마감한 후에도 계속 그의 환영을 겪는다. 그것이 현실일 리 없음을 그녀 또한 잘 알지만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공허함에 전 재산을 아동 복지재단에 기부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새 프로젝트로 또 한 명의 대학 동기이자 배우인 소민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
드라마 제작사의 마케팅 PD인 한주는 오늘도 힘겨운 을의 처지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신입사원 재훈이 팀에 합류하면서 직장생활에서도, 그녀의 인생에도 새로운 힘을 얻는다.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 혜정의 보조작가로 일하던 진주는 방송국 공모전에 제출한 대본이 독특한 성격이지만 능력은 탁월한 젊은 스타 PD 범수의 눈에 띄면서 정식 데뷔의 기회를 잡게 된다.
2019년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다. 이 드라마는 '극한직업'으로 엄청난 흥행력과 자신만의 탁월한 감각을 인정 받은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드라마다.
이 작품 역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병헌 감독만의 독창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연출을 보여주며 많은 호평을 얻었다. 시청률은 2%에도 못 미치는 아쉬운 성적을 남겼지만, 많은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이후에도 수년동안 유튜브나 SNS 등에서 방영 이후에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지금도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유쾌함에 기반한다. 이병헌이라는 스타 감독 특유의 당연하고도 명확한 스타일이다.
이병헌 감독 최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말맛'이 16부라는 긴 드라마의 호흡에서 영화만큼 효과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우려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우려조차 우습게 지워버린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촌철살인의 뼈 있는 대사부터 적재적소에 터지는 유머까지 그야말로 긴 드라마를 꽉꽉 채우는 저력으로 그야말로 말맛의 대향연을 펼친다.
기존 드라마와는 템포와 질부터 다른 웃음 포인트는 물론이거니와, 중요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과도하게 몰아가지 않는 쿨한 연출, 하지만 순간순간에 등장하는 깊은 통찰을 주는 대사들이 적절한 합을 이룬다.
마치 사랑에 대한 격언집에나 나올법한 무게 있고 가슴에 와닿는 대사들은 매 회 엔딩을 그 회차에서 나온 대사만으로 사랑의 의미와 본질, 시각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와 여운을 던질 정도. 그만큼 그냥 웃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과 감독의 철학을 진중하게 코미디 안에 녹여넣은 수작이라는 의미다.
유쾌함을 무기로 사랑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풀어가는 이 드라마만의 매력은 주제가인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와 찰떡으로 어우러진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과 경쾌함을 도입부터 기타 소리가 주는 특유의 청량함으로 표현해낸 이 곡은 지금도 듣는 순간 드라마를 볼 때 느꼈던 감정과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노래가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벚꽃엔딩’에 버금가는 장시간의 대중적 인기를 이어간 덕분에 이 드라마의 팬들은 지나가다 문득문득 이 곡을 만나며 다시금 드라마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한다
이 드라마에는 굉장히 많은 사랑이 등장한다. 진주와 범수는 일로 만난 사이지만,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으로 발전한다. 심지어 진주가 대학 때부터 오랫동안 사귄 전 남자친구는 범수 밑에서 일하는 후배 PD이고, 매사 부딪칠 수밖에 없는 PD와 작가의 관계에서 서로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싸우기도 하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만, 합리적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일과 사랑을 함께 만들어간다.
한주는 무책임하게 남편이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떠난 뒤에도 홀로 9년 동안 아이를 키워왔다. 당연히 일과 육아에 매달리느라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재훈을 만나고 자신의 틀을 조금씩 깨 나가며 결국 다시 연애까지 하게 된다.
은정은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다 못해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옆에 두려 한다. 두 사람 중 누군가 의도한 이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갈라진 사이. 그래서인지 은정은 그가 없는 듯 사는 삶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다. 항상 현실에 없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중요한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애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녀를 걱정한 친구들과 동생의 마음을 알기에 결국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고, 조금씩 전 연인을 지워가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시점에 수민을 취재하며 만난 '야감독'과 생각지 못한 마주침이 이어지며 새로운 인연을 시작할 가능성을 찾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항상 아름답기만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에게는 작게 느껴질지 모르는, 경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지 모르는 크고 작은 걸림돌들이 있다.각자의 사정, 혹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이런 저런 상황들은 때로는 그 사랑을 위협하기도, 때로는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가로막기도 한다.
은정은 서로의 문제가 아닌,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하고 자신의 삶까지 그 이별에 잠식되어 버렸다. 은정의 에피소드는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로 시작해 결국은 새로운 인연에 닿는 지점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사랑과 이별은 때로 상처와 후유증을 남기지만, 우리는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계속 사랑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이 드라마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를 보어주며, 은정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이러한 메시지가 특히 확연히 느껴진다.
각양각색의 배우, 커플들을 보는 재미
이들 주인공 세 명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이 드라마에는 정말 많고 다양한 커플이 등장한다. 연기구멍 하나 없이 각각의 톡톡 튀는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려낸 많은 배우들의 연기는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배가시키며, 그런 연기력과 재미 요소는 다양한 사랑을 다루는 이 드라마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오랫동안 매니저와 배우의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용기 내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는 소민과 민주 커플, 동성인 연인과 사랑하고 있는 은정의 동생 효봉 커플, 오래된 업무 파트너의 관계를 힘겹게 벗어나 이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낸 혜정 작가와 성 국장 커플, 가진 것 없는 공시생이지만 순수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진주의 동생 지영 커플까지 이 드라마에는 굉장히 많은 사랑이 등장한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계가, 세상의 시선과 선입견이, 각자의 경제적 상황이나 처지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그들을 주저하거나 망설이게 하고, 지금의 사랑의 미래를 불투명해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사랑하고, 사랑의 기쁨과 소중함을 마주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들의 시련, 혹은 사연, 어려움에 경중을 두지 않는다.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유쾌한 분위기 속에 각자가 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 그대로 담아내며 그들의 사연과 사정 하나 하나가 바로 사랑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그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행복임을 드라마를 보며 느끼게 된다.
* 이미지 출처: JTBC '멜로가 체질' 공식 홈페이지 포토갤러리, 넷플릭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