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고 바람 분다고 화내지 말고
매일 벌어지는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수고스럽겠지만 그냥 받아들이세요.
날씨처럼요.
비 오고 바람 분다고 슬퍼하지 말고
해가 뜨겁다고 화내지 말고.
-화가 노은님-
파독 간호사에서 '어쩌다' 화가가 된 작가 노은님의 생전 인터뷰 내용이다. 그런데 왠지 '어쩌다'라는 표현이 신경 쓰인다. 간호사가 직업이었던 그녀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을까?
얼마 전 나는 우연히 엄마 밴드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 밴드 로망이 있었던 나는 보컬이 필요하다는 말에 용기를 내서 지원을 한 것이다. 물론 수준은 딱 노래방 실력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은 키보드 연주자가 부족하단다. 그렇게 기본 코드 밖에 모르던 나는 얼떨결에 반주 악보를 받아왔다. 예전의 나라면 손사래를 치며 못한다고 했을 것을 나이 마흔이 넘으니 자존감에도 뿔이 났나보다. 실패가 없으면 도전도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 끔찍하게 다가왔던 어느날부터 나는 늦은 열정에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밴드 연습은 첫날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고작 여섯 명으로 구성된 엄마 밴드는 음악 취향부터 가지각색이었다. 개인적으로 재즈와 록 발라드, 인디밴드 취향의 내 감성은 그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보여지는 것보다 즐기는 것에 치중하고 싶은 내 욕망은 종종 있을 대외 공연이라는 현실에 가둬야 할 지도 몰랐다. 10년 전 회사를 때려치울 때 이제 더는 하고싶지 않은 일은 그만두겠노라 다짐했던 나였는데 생업도 아닌 취미생활로 참여하게 된 밴드가 나를 시험하다니, 듣기 싫은 음악을 수십 번 듣고 연주하고 가사를 외우고 공연에 참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굳이?
첫 연습 이후 일주일을 고사하며 나는 뭐든 함께한다는 건 즐겁기도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함을 새삼 깨달았다. 직장생활과 각종 커뮤니티, 엄마 모임을 통해 인간관계에 지친 나는 지난 몇 년 간 휴지기를 가졌었는데 설마 사회생활에 대한 감이 떨어진걸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관계' 속으로 되돌아올 것을 말이다. 다만 관계에 대한 내 생각은 예전과 달랐다. 관계는 물론 중요하지만 더 이상 관계가 다는 아니었다. 쉬운 예로 내가 교회를 다닌다면 그건 하나님을 믿기 위함이지 교인들을 따르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내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통한 배움과 이로운 변화지 관계로인해 나를 소모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불편했던 '다름'은 어느새 '차이'가 되어 내게 적당한 자극이 되었고 나는 일단 그들의 속도에 맞출 수 있었다. 변화는 언제든 좋은 타이밍에 적극 시도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좋은 건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패턴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는 점이다. 물론 꼰대에 답정너가 되지 않으려면 확신에도 유연성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유연성조차도 경험치에서 비롯된다는 건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양한 굴곡을 이루며 때때로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마침내 균형을 이룬다는 것, 과거 경험에 비추어보면 무엇이 되었든 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일정 시간을 투자해 보는 게 맞았다. 좀 거창하지만 나는 밴드를 통해 하마터면 갇혀버릴 뻔 했던 나만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다시 화가 노은님을 떠올려보자. 그림을 좋아했던 그녀는 간호사로 일하며 꾸준히 쌓아왔던 습작으로 마침내 기회를 얻었고 빠르게 재능을 인정받아 인생 후반전은 화가로서 삶을 마칠 수 있었다. 제법 순조로워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치열하지 않았을까? 다만 노은님의 말처럼 그녀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은 매일 일어나는 일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고 날씨처럼 바람처럼 그녀는 온전히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수고스러워도 좋을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받아들임'이란 비오는 날 우산을 내려놓고 비를 맞아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우산이 있으면 우산을 쓰되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흠뻑 젖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새로운 변화를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어느새 소음처럼 들렸던 밴드 연습곡을 격하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만 록커로 생을 마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