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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Apr 02. 2024

부모의 이중 메시지 읽기

난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진심이야. 난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부모 또는 연인 등 가까운 사람에게 위와 같은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분명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니 더없이 무해하고 따뜻한 말이 아닌가? 살면서 무수히 들어봤을 수도 있는 말이다. 나는 제일 먼저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모님 외에 나만큼 나를 아껴주는 이는 없지 않은가?


"다 너를 위해서야."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너만 행복하면 돼."


여기 어떤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예쁜 유리병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네가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나비를 잡아서 병 속에 넣어 영원히 영원히 간직했으면 좋겠어."라고. <스몰 트라우마>


<스몰 트라우마>의 저자 맥 애럴은 책에서 "난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라는 말이 현대사회에서 매우 해로운 감성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신이 아닌 타자의 행복만을 바란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나비를 예로 들어보겠다. 물론 나비는 실제 존재하고 우리는 나비를 잡아서 병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나비는 절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나비 따위는 없다.


맙소사, 갑자기 숨이 막혀온다. 나는 꽤 오랜 시간 행복을 쫓으며 마땅히 행복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행복이 오면 행복이 떠나지 못 하도록 바둥거리느라 충분히 행복을 누리지 못했고 불행이 닥치면 행복이 떠오르지 않아 더없이 절망스러웠다. 나는 행복을 영원히 박제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걸까? 어머니는 나의 영원한 행복을 욕망하셨던 것일까? 하지만 내겐 너무 버거운 의무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는 가끔 불행해도 괜찮았다.


과거 나의 어머니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해 주곤 했다. 나의 행복만을 빈다고, 다 나를 위한 거라고. 그때 나는 웬일인지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고 맘속으로 어머니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엄마의 행복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순간 어린 나는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꼈던 걸까? 다만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부모님의 '절대적 사랑'이란 것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라는 의문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너무도 많은 흔적은 부모도 힘들고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이라는 숨은 의미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어른들은 알까? 물론  대놓고 말하는 부모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이젠 그 말이 고의도 거짓도 아니었음을 알 것 같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을 수 있듯 부모 역시 우리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혼란을 겪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부모는 아이들에게 선택적으로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 주입하는데 행동은 일치하지 않으니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엄마도 힘들고 행복하고 싶다'라는 나머지 하나의 메시지는 꼭꼭 숨겨져 끝끝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하니 말이다. 아마도 인간이 가진 이타성 추구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사춘기 딸아이와의 대화이다.


엄마: 채은아, 너는 너만 행복하면 된다.  

딸: (벌써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래.

엄마: 엄마는 엄마가 알아서 행복할 거니까!

딸: (풀어지며 웃는다) ㅎ


고백하건데 과거 나 역시 아이에게 이중 메시지를 보내곤 했었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춘기 딸아이는 나에게 이중 메시지라는 단어를 숙제처럼 던졌고 나는 그것을 곱씹고 곱씹게 된 것이다. 부끄럽지만 처음에는 회피하고 부정했다. 나는 다른 엄마라고 자만했고 그것이 함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를 꽤 많이 떠올렸고 수 차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낼 수 있었다. 아이는 너무나 영민하게도 자기 방식으로 자율성을 지켜냈고 나는 좋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절 나의 행복만을 바란다던 어머니의 말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의 따뜻한 이면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춘기 아이의 공로가 크다. 행복과 불행은 공존해도 좋고 각자 행복은 각자의 몫인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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