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연대기
우리는 모두 정체성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일 뿐이다. -매기 오파렐-
국어사전에서 정체성 뜻은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 명사이며 Identity는 16세기 후기부터 '같은 성질'이라는 의미로 사용다. 또한 identity는 후기 라틴어 'identitas' 또는 '같은'이라는 'idem'에서 비롯되었고 동사형인 'identify'는 '확인하다'라는 뜻으로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아닌 남에 의한 확인과 증명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밝혀준다.
찾았다.
모두에게 있어서 '정체성'에 대한 그간의 이해가 다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정체성이 불변의 이치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실제로 돌아보면 내 인생 전반기에 걸친 정체성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일 뿐이지 결코 타자의 확인과 증명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정체성에 대해서 '자아를 발견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를 내려놓고 타인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나'의 정체성은 '타자'와 떼어놓을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 역시 아니다. 다만 타자는 내가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거울이 되어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 다만 이때 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나의 판단에 달렸고 거울 속 내 모습은 꾸준히 변화할 수도 있다. 즉, 정체성이란 머물러있는 것이 아닌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총.균.쇠>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책 <대변동>에서 핀란드의 예를 들며 유독 국가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반대의 예로 칠레와 인도네시아를 예로 들며 유권자가 문해력을 갖추고 강력한 국가 정체성이 폭넓게 확산되어야 정직한 자기평가가 가능하며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의 아이디 연대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별 의미 없이 지었던 과거 내 아이디들의 실상은 나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 아이디는 토마토였다. 토마토는 과거 쉽게 홍조를 띠던 내 피부색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대학시절 술만 먹으면 얼굴이 붉어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선배 별명이 불고구마였는데 불고구마(불타는 고구마)가 아닌 건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토마토라는 별칭을 꽤 좋아했다. 왜냐하면 토마토는 내가 알고 있는 식물 중에서 가장 친숙하고 독특하고 진실하고 이롭기 때문이었다. 좀 과장되지만 사실이고 이 기회에 토마토에 대해 소개할 수 있어 대단히 영광이다.
먼저, 토마토가 채소냐 과일이냐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토마토는 가지과에 속하는 채소이다. 토마토의 제철은 5월 중순경부터 9월까지로 주로 여름이지만 비닐하우스에서 1년 내내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든 포동포동하고 새콤한 토마토를 맛 볼 수 있다. 토마토의 영양 가치는 말 해서 뭐할까. 실제로 '토마토는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채소 1위'라는 우리나라 농담과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갈수록 의사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간다'라는 서양 속담도 있다. 마지막으로 토마토가 어째서 진실하기까지 한지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냉장고 문을 열고 토마토를 꺼내서 이등분을 해 보자.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을 통틀어서 겉과 속이 같은 채소는 토마토가 유일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지어 심장모양을 닮은 구성물까지 확인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이렇게 나의 첫 아이디는 토마토에서, tomato, fanqie(중국어) 심지어 영국에서 19세기까지 불렸다는 토마토의 별칭 러브애플(love apple)이라는 아이디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여담인데 다음 아이디로 준비하고 있는 이름은 바로 pomodoro, 이탈리아어 황금 사과에서 유래한 토마토의 다른 이름이다.
신이나서 토마토를 설명하다 보니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문득 나의 아이디 연대기를 돌아보니 역시 내가 추구하는 나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 최근엔 바람꽃이라는 말이 좋아서 아이디로 쓰기 시작했는데 소리 나는 바람의 발음이 좋고 화사하지만 가벼이 바람의 기운을 받은 꽃이라는 맺음자(字)가 좋아서다.
끝으로 내가 탐구하고 존경하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정체성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 찾아봤다. 니체는 인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3가지 변신을 예로 들었는데 이 중 낙타는 무거운 짐을 견디는 태도, 사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힘 그리고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다음 나의 아이디는 니체의 지혜로움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