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을 벗어나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누구에게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있다. 하지만 매번 긍정적인 결과와 만족을 불러올 수는 없다. 그 차이는 터닝(turning) 자체가 우연과 타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의에 의한 것인지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두 경우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자.
터닝 포인트의 다른 말은 삶의 전환점, 즉 변화의 지점을 의미한다. 인간은 삶의 방향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지만 미래를 설계하고 노력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谋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일은 사람이 계획하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뜻으로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일도 많다'의 속뜻을 가지는데 사실 이 말에는 이미 ‘주관적인 노력'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 이를 잘 못 이해하면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테고 실제로 모든 노력이 성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 말이다.
반면 '인정승천(人定胜天)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이 노력하면 하늘도 이길 수 있다는 뜻으로 인력으로 운명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만 인정승천이라는 성어는 위 삼국지연 제갈량의 말만큼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정편향의 영향인걸까? 여담으로 인정승천을 주장한 윤길보(尹吉甫)는 중국 유교 경전인 시경을 수집한 철학자이니 제갈량을 만들어낸 나관중에 견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쯤에서 잠시 투덜거려도 될까? 역사 속 수많은 성현은 사실 거의 한 번도 A는 B라고 직언하지 않는다. 언제나 A는 B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고 진리는 양날의 검이 되어 '결국 선택은 네 몫이야'라고 우리에게 바통을 넘긴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논리가 아닌가? 거기에 더해 정작 성현들의 인생이 순탄한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그들의 지혜를 곱씹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고뇌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냥 닥치고 현재를 즐기는건 어떨까?
실제로 나는 종종 열심히 저축한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릴까 봐 불안한 적이 있다.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삶이라면 내 인생을 운명에 맡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펑펑 쓰고 즐기는 친구를 보며 나는 왜 그렇게 못 할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요즘 중국에 유행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소개해 볼까 한다. '권불기, 당불평' (卷不起,躺不平), 직역하면 구르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형국을 말한다. 여기서 구른다는 말은 현대 사회의 경쟁을 의미하고 눕는다는 말은 경쟁을 포기하고 되는 데로 살기로 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나온 파생어가 바로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탕핑족(躺平族: 평평하게 누워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과연 탕핑족은 닥치고 현재를 즐기고 있을까? 대답은 역시 No 다. 탕핑족은 오히려 비겁한 편에 속한다. 아무리 돌려 말해도 결국 경쟁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닌가? 게다가 누워 포기하는것 조차도 자의가 아닌 패배의 결과라면 차라리 인정승천(人定胜天)을 택하는 편이 나으리라. 사실 꼭 경쟁이 아닌 성실함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자율적이고 꽤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데 말이다.
과연 당신은 살면서 몇 번의 강도 높은 실패를 경험해보았는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하지 않았던 나는 솔직히 가난이 뭔지 잘 모른다. 그렇다고 부유하게 자라지도 못했던 나는 적당히 비겁하게 보통의 인생을 살았다. 최선이라는 말은 또 무엇일까? 노동과 휴식의 발란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렇지 못 할 때면 불평불만을 했을 뿐 고통을 감내하고 견디는 경험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적어도 결혼을 해서 직접 아이를 키워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대충 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맞벌이를 하며 직장에 다닐 때는 그나마 숨통이라도 트였다. 나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불려졌고 종종 한가로이 커피를 마셨으며 연말 행사 때 받은 상여금으로 블링블링 후광을 뽐내기도 했다. 틀림없이 그랬다. 그런데 내 인생의 총체적 난국은 육아를 위해 10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시작되었다. 문득 서러워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눌러 담아본다.
나에게도 회사를 관두고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엄마 모임은 뭐가 그리 많은지 참여하지 않으면 받을 불이익에 몸사리며 나는 최선을 다해 그간 부족했던 부분을 숙제처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년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예중 준비를 하는 딸아이의 일정이 너무나 빽빽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4년 정도 지난 후 나는 당당히 자녀를 예중 보낸 엄마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얻었고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예상했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나는 절망했다. 과거 잘나갔던 시절엔 내가 얼마를 버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단 한 푼이라도 내 돈을 쓰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누가 뭐라 한 적도 없는데 남편에게 받아쓰는 돈이 어쩜 그리도 치사하고 구차하던지. 그렇게 나는 한동안 묘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서 애꿏은 남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당시 가장 아픈 그의 한 마디는 "그래 그럼, 이제 당신 하고싶은 일 해."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화 날 일도 아니었건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 멘탈은 남편의 평범한 단 한 마디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숨 막히는 우울감에 새벽녘 소파에 앉아 멍때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나는 문득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은 결국 수많은 '지금'이 모인 상태일 뿐, 그것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로 불리지만 멈춰있지 않은 유기적 또는 역동적인 흐름으로 심지어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 또 따로 하는 가족과 친구, 동료, 지인들은 모두 한때 나를 거쳐 가는 인연일 뿐이며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 있지 않은가! 광활한 우주 속 지구라는 행성의 작고 미비한 나는 시간의 흐름 속 한 지점에 주저앉아 그야말로 생떼를 쓰는 중이었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고 대부분의 삶은 다양한 굴곡을 이룰 뿐 최고 또는 최악의 정점을 찍지도 않는다. 우리가 생각했던 바닥의 심연은 우리의 불안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생각보다 최악이 아닐 수 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실천하면 그뿐이었다. 이참에 적당히 게으름을 피워 쉬어가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 결국 나를 옥죄는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뻔한 결말이지만 나는 이내 괜찮아졌고 가정을 돌보면서 수익도 낼 수 있는 디지털노마드의 삶을 걷게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흐르고 관찰자로서 내 인생을 돌아볼 수 있을 시간이 왔을 때, 나는 과거 내 불안의 근원이 바로 '자율성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돌아보면 내 인생은 언제나 타인의 평가안에 갖혀 있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타인의 생각을 배제하고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스운 건 경쟁에 처했을 때가 가장 곤란했다는 점인데 나는 이겨도 져도 마음이 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도전을 멀리했고 실패라는 가치 있는 경험치도 많지 않다. 타고나길 죄의식이 강했던 나는 늘 결과보다 과정에 집착했고 상황보다 사람을 신경썼다. 그렇다고 나는 절대 선(善)인가? 터무니없다. 나는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에 당당하지 못했을 뿐, 이는 나 때문이었지만 결코 내 탓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읽히는 순간 내 마음은 평온해졌다.
이제 마무리 할 시간이다. 내 글은 비교적 거창함을 나도 안다. 이렇게 바짝 무게를 잡는 이유는 내가 아직 열정이 충만한 '초짜'라서 그러니 대충 이해해 주기를. 그렇게 파국으로 달리던 나의 총체적 난국은 결국 일단락이 되었고 이제 내게도 인생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여전히 종종 나락으로 치닫는 순간도 있고 현실적인 상황은 오히려 예전만 못하지만 나는 이제 삶의 질척임과 찌질함을 가뿐히 뛰어넘을 순발력도 갖게되었다. 물론 늘 그렇진 않지만 그런 날들이 많아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변화는 바로 내가 변화를 알아채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닌 우직하게 노력하다가 기대하고 낙담하는 것도 아닌, 나는 나의 작은 성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의 변화를 격려했다.
변화를 알아채면 달라지는 것들은 무엇일까? 바로 인생의 변곡점에서 자의적인 터닝(turning)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귀인을 만나거나 우연히 일이 잘 풀려서도 아닌 오로지 내 의지와 계획으로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설정할 수 있다. 우연 또는 운명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고 순간의 변화들에 적절히 반응하면 우연은 선물이 되고 계획에 없던 불행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변화가 내가 이루어 낸 정직하고 꾸준한 것들이라는 확신이 들 때면 나는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떠한 일이 우연히 잘 풀리지 않을 확률만큼 우연히 잘 풀릴 확률도 있음을 알고 나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내 인생의 데이터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나머지 몫은 하늘에 맡기되 나는 언제나 방황과 변화를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