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와 작별하기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은 낡은 자신을 소환해서 죽여야만
비로소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 내 꿈은 '가수'였다. 그 당시 유행하던 이선희의 노래 중 '갈등'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때가 내 나이 9살,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줄만 알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노래 구절 중 '이내 작은 가슴에 가슴에 아픈 추억을 두 번 다시, 만들지 만들지 마세요'라는 이 부분, 어찌나 구성지게 불렀던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할 때마다 박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수가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학급 노래자랑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한 번은, 전 학년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던 남자애 하나가 휑한 운동장에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경계하는 눈빛으로 한참을 아래위로 나를 훑고는 무심한 듯 한마디 내뱉더라. "뚱뚱한 아이는 노래를 못 해." 지금까지도 종종 나는 그때 그 말, 그 아이의 표정이 떠오른다. 심지어 그날의 날씨까지 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지금 초등학교 때 사진을 펼쳐보면 나는 그때 정말 하나도 뚱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문득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졌다.
살다 보면 종종 인생 송두리째 영향을 끼치는 '나쁜 말'들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왜 그 말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가수의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은 어떤 나이일까. 이제는 '누구나'와 놀지 않고 '단짝 친구'를 만들기 시작한 때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의해 점차 친구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왕따'라는 표현이 없었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반에 대표적인 '왕따'가 한 둘이 있었다. 하나는 '한글'을 못 떼서 버벅대던 아이, 다른 하나는 머리에서 '이'가 나왔다고 놀림당하던 아이. 그 사이에서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마도 비겁한 '방관자'쯤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어린 방관자인 내 모습이 부끄러웠던 탓일까.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한동안 왕따 지킴이를 자처한 적도 있었다. 다만 그것 역시 올바른 선택은 아니었음을 지금은 안다. 왕따에 관한 포스팅은 따로 하기로 하자.
쌍꺼풀 진 커다란 두 눈, 오뚝한 콧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어릴 땐 나도 미스 코리아 나가라는 소리 꽤나 듣고 살았다. 그래서 지금은 안다. 예쁘게 생겼다는 칭찬은 결코 나에게 좋은 칭찬이 아니었음을. 물론 칭찬하는 이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아이가 받은 칭찬이 오로지 외모에 관한 칭찬이라면 어떨까?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쁘게 태어났다는 칭찬보다는 오늘 입은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 좋지 않은가? 원피스는 맘에 안 들면 바꿔 입으면 그만이다. 안타깝게도 그 시절의 나는 '여자는 예쁘면 다 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 나는 나의 외모에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고 머지않아 환상이 깨지는 과정을 겪었다. 이어, 처참하게 열등감에 절어 지낸 과거도 있다.
인간이 가장 못생겨질 때가 있다면 바로 '사춘기'때가 아닐까. 지금이야 십 대를 떠올리면 풋풋하고 순수하며 심지어 예쁘다. 어쩌면 그 당시 내가 '라붐'이라는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를 보았던 충격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는 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아이들은 사춘기 때 가장 못생겨지더라. 물론 나는 정확히 '외모'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아름다운 10대'라는 나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아는 사춘기 아이들은 골격이 커지면서 이상하게도 '코'에 살이 붙고 납작해진다. 잠시, 나의 중학교 때 사진을 봐도 그렇고 내 딸아이를 봐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나는 중학교 때 여드름은 안 났는데 딸아이는 벌써부터 이마에 붉은 별이 떴다. 나의 중학교 때 사진을 보자. 뚜렷하던 쌍꺼풀은 부어오른 눈두덩에 매몰되어 흔적도 없고 오뚝하던 코에는 어느새 살이 덕지덕지 붙어 마치 코주부를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 나는 여전히 내가 예뻐 보였다는 사실, 어쩌면 십 대의 나는 나르시시스트였을까?
여중과 여고를 졸업한 나는 쭉 그렇게 '내가 예쁜 줄' 알고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남녀공학'인 대학교에 진학하여 첫 OT에 갔던 때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 과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좀 많았고 검증할 순 없지만 학년 통틀어 우리 과에 예쁜 여자애들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OT에 온 여자아이 중 예쁘고 세련되게 꾸민 아이들이 여럿 있었고 이미 그들은 주목받고 있었다. 당연히 질투가 났다. 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한 두 명의 '가장' 눈에 띄는 여자를 집중적으로 좋아하는지. '우리들의 첫사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가장 예쁜 아이' 중 하나가 바로 나의 대학 절친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외모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음을 알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철이 없었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알프레드 아들어-
그렇게 나의 대학시절은 열등감으로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내 얼굴에는 사춘기 때도 없던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고 결국 나의 '미적 자신감'은 바닥을 찍고 말았다. 그런데 인생 참 묘하다. 그즈음 나는 내 인생을 바꿔놓은 내 첫사랑을 만났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연애사로 흘러갔는데 실제로 내 인생을 바꿔놓은 건 나의 첫 연애였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나의 타이밍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가장 열등하다고 느낄 때 나를 가장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를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심지어 내 부모보다 더 나를 아껴주었던 기억이 있다. 얼마나 달달한 연애였는지는 각자의 상상력에 맡겨본다.
중요한 건, 나는 더 이상 열등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거짓말처럼 내 인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 일생에 최고의 날들이었고 나는 거의 모든 일에 열심일 수 있었다. 나중에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가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만약 우연한 기회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만큼 예쁘게 웃어 줄 자신은 없지만 정말 고마웠노라고 전해주고 싶다.
첫 연애 이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전에 없이 공부에 진심이었고 인간관계도 보다 능숙해졌다. 열심히 했으니 좋은 성과는 당연했다. 정말 바쁠 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2시까지 공부와 아르바이트, 연애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물론 그즈음 나는 외모 따위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매력적인 성격과 에너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 경험했고 내가 내 인생에 충실할 때 좋은 사람들은 부록처럼 따라왔다. 이전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에는 24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꽤 고집 있는 편이다. 대학시절 한 번은 나에게 호감을 느끼던 남사친이 편지에 내가 너무 독특해서 좋지만 한편 불안하다고 쓴 적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오래도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남 따라 하는 걸 싫어했다.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대한민국에 살기엔 좀 아슬아슬하게 느낀 적도 많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애사심, 소속감, 애국심 등에 별 감흥이 없다. 왜 그럴까.
오랜 시간 깊이 고민한 결과 나에게는 통제의 불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랑을 할 때에도 나는 나의 전부를 내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게 있어 의지한다는 건, 마치 내 행복을 그에게 맡겨놓고 안절부절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꽤 독립적이지만 종종 그런 내가 의아스럽다. 그리고 이런 성격이 대체로 나에겐 좋지만 복병은 늘 숨어있다. 내게 복병(伏兵)은 바로 나의 내면 아이였고 곧 내게도 '약해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 정신분석가 카를 구스타프 융-
마흔이 될 무렵 나는 정신분석가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라는 책을 만났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의 저자 박우란 선생님 책도 좋아하는데 역시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마흔의 문턱에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하고 싶다. 삶의 변수가 작용하긴 했지만 덕분에 나는 마흔 초반에 느꼈던 '미혹(迷惑)'이 점점 '불혹(不惑)'으로 바뀌어감을 경험하는 중이다. 물론 여전히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 제외하고 말이다.
마흔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내면 아이'와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마흔에도 커다란 폭탄이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다루는데 서툴렀다. 하지만 꾸준히 호기심을 갖고 나와의 대화를 시도한 결과 지금은 꽤 단단해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건 책, 음악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누구나 내면 아이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면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100명이 있다면 100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필요하다면 피하지 않기를. 내면 아이를 만나는 작업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나를 보내며 애도하는 과정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