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함 내려놓기
만약 나이 들어서 총기가 떨어졌다면
필시 사고가 편협해졌기 때문입니다.
총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인도 낯선 상황을 피하면 안 됩니다.
-마크 E. 윌리엄스-
지난 1월 우리나라 여성 평균 수명이 처음으로 90세를 돌파했다고 한다. 과거 1970년 한국의 기대수명이 62.3세였으니 100세 시대라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직도 반백년이 더 남은 삶을 위해 마음이 분주해진다.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 '늦깎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흔 넘은 나는 이제 늦깎이에 속하지도 않는다. 60세, 70세 심지어 80세 이상의 수많은 늦깎이들이 열정적으로 배움에 참여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 분명 배움에는 연령이 없다.
안데르스 에릭손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는 1993년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개념을 발표했다. 이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며, 약 매일 3시간씩 10년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60세부터 10년 동안 피아노를 연습하면 피아니스트가 된다는 말일까? 나는 1만 시간의 법칙이 늦깎이에게도 유효하며 오히려 유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리치 칼라아드는 책 <레이트 블루머>를 통해 호기심, 연민, 회복력, 평정심, 통찰력, 지혜라는 6가지 레이트 블루머의 장점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다만 나는 레이트 블루머에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레이트 블루머라는 단어는 거창하니 지금부터 '성인 학습자'로 바꾸어 이야기해 보겠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성인 학습자는 어린 학습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거만함'을 가지고 있다. 경험으로부터 오는 자신감, 상대방을 고치려 드는 고집,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거만함, 이러한 거만함은 클루지(Kluge: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그러나 놀라울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 또는 인류의 흑역사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거만함'을 잘 극복한 성인 학습자만이 비로소 '레이트 블루머(늦게 피는 꽃)'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피어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거만함'을 유능하게 다룰 줄 안다. 답은 겸손함이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울 때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내려다보지 마라.
-Jesse Jackson-
'겸손함'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 또는 태도이다. 매우 익숙한 단어이지만 모호하기 그지없다. 대체 나를 얼마나 어떻게 낮출 것인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는 겸손함의 미덕을 잊은 지 오래다. 과거 '자기 PR(public relations)'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홍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다만 21세기에는 굳이 자기 PR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과잉 자기 PR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향형 인간이 살기에 참 퍽퍽한 시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당당하게 살고자 했던 우리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자기를 드러냈을 뿐인데 유감스럽게도 '자의식 과잉'이라는 부작용도 얻었다. 자의식 과잉이란 실제 존재하지 않는 남의 시선 따위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으로 심하면 강박 또는 불안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비슷한 단어로는 자아도취 또는 나르시시즘을 들 수 있겠다.
나는 이러한 성인 학습자의 거만이라는 약점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메타 인지(Metacognition)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메타인지는 내가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앞서 말한 레이트 블루머의 통찰력 또는 지혜와도 유사한 의미이다. 수없이 강조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건 너무나 중요한 덕목이다. 모든 성인 학습자가 레이트 블루머가 될 수는 없다. 물론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값진 일이지만 목표한 일을 꾸준히 실천하여 성과를 엊고싶다면 반드시 거만함을 내려놔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얼마나 거만했는가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한 번은 독학으로 익혔던 수영을 정식으로 배우기 위해 수강신청을 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물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왔던 나는 평영, 자유형, 배영을 스스로 익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만 자세가 엉성해서 속도와 폼이 안 난다고 여긴 나는 비싼 수강료를 들여서 1:1 수업을 고집했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수영 자세를 섭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웬걸, 첫 수업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잘못된 자세로 수영에 임했던 내 몸은 새로운 방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어이없었던 건 내 배움의 태도였다. 수영 코치에게 이러쿵저러쿵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가 0인 사람들보다 낫지 않겠냐며 나를 설명했고 심지어 바뀌지 않는 내 자세를 두고 코치가 잘 못 가르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아. 부끄러우니 여기까지. 다행히 나는 늦지 않게 내 거만함을 인지하고 0 기초로 돌아가 수영을 다시 배우고 있다.
나는 배움의 연령이 0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내 경우 과거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나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경험이 많다. 확증편향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맞다'는 편견, 성인 학습자에게 경험은 가치 있지만 지독한 확증편향을 불러오기도 한다. 자칫 자신의 경험을 너무 믿으면 '답정너' 또는 '고인물'로 전락하기 십상이니 주의하자. 역설적으로 레이트 블루머에게 있어서 고집의 순기능도 무시할 순 없지만 이는 본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거만했던 내가 거만함을 내려놓자고 설득하는 모양새가 좀 우습지만. 나는 진심으로 레이트 블루머를 응원한다. 실수를 하면 실수에서 배우고 잘못을 하면 바로잡으면 된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약점이 되어선 안된다. 중년에게 있어서 배움의 태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모든 어른이 어른다운건 아니니까 말이다. 어쩌면 지금 가진 것에서 오로지 '거만함' 하나만 내려놔도 우리는 당장 꽃을 피우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꽃을 피우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삶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