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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May 02. 2024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인간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김영하 작가 인터뷰에서-



과거 한참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빠져있을 때였다. JTBC에서 방영하는 <슈퍼밴드> 시즌1에서 보컬 출연자 이찬솔이 불렀던 《Still fighting it》을 듣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뇌리에 더욱 깊게 각인되었던 한마디 ‘삶이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싸움’이라고 했던가. 바로 윤종신이 절제된 눈물을 머금고 했던 소감 한마디였다.

 

그 당시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더없이 긍정적이었던 나로선. 윤종신 프로듀서의 소감이 가슴에 와닿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땅히 반박해야 하는데 한 마디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삶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싸움이 맞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나의 행복과 불행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건 오로지 어린아이의 생존 본능이었으리라. 우리 모두 가난했던 시절이라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기억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일종의 여과기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통해 불편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덜어내고 있었다. 드문드문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어둠의 실마리는 꾹꾹 눌러뒀다. 유년이란 그저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잔혹 동화의 실화 배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을 잊고 사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 혼자가 되니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행복과 불행은 오로지 내게 달렸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됐다. 사실 나는 그 시절,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타임머신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도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또다시 나의 통제권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의 세상은 남편과 아이로 채워졌고 나는 점점 그들로 인해 행복하거나 불행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지킬 것도 많아졌다. 가뜩이나 알 수 없는 미래인데 혼자가 셋이 되니 불안은 세 배로 커졌고 그중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여전히 담담할 수가 없다.


부모님의 연세가 많아지고 병환이 깊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역시 내적 모순의 연속이었다. 무엇 하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식새끼 때문에 산다며 하루하루 버티던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들이 버텨준 만큼 나는 잘 자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정 내 새끼 챙긴다고 나는 매일 먹고 자고 웃는다. 참으로 '어리둥절한 인생'이 아닌가. 삶은 분명 통제불가능한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며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싸움이리라. 아무리 긍정으로 무장하며 시치미를 떼 봐도 별 수 없었다.


불안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나는 다시 나의 내면아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즈음 내 나이 마흔을 지나고 있었으니 어쩌면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으로 닿는 길이었을까? 나는 더 이상 과거를 여과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엔 즐거운 기억은 잠시 내려두고 굳이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다. 일부는 아이 덕분이리라. 아이를 키우며 나는 유년과 청소년기를 나는 다시 한번 살고 있었다. 기억이 가까워질수록 고통의 실체도 뚜렷해짐을 느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떤 일들은 징그러운 벌레처럼 한동안 내 온몸을 기어 다녔고 그런 나를, 나는 충분히 토닥이며 애도할 수 있었다. 고통은 과거와 현재로의 통로를 두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말도 안되는 바람이지만 내심 나는 나의 불행의 총량이 다 했기를 기도했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빨강머리 앤> 앨리자의 말-


기독교에서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고 말하고 싶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그림자는 빛이 존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있다. 죽을 것 같았지만 배는 고프며, 고통을 호소하다가도 웃는 순간이 있다. 마치 낮과 밤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떼어놓지 않는다면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you're so much like me I'm sorry.
넌 나를 참 많이 닮았구나.
그래서 미안해.
-Ben Folds <still fighting it>-

오늘 쓰는 이 글은 사실 새드엔딩이 아니다. 너는 나를 참 많이 닮았구나. 그래서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말속에는 슬픔도 있지만 사랑도 있다. 불행을 닮아 두렵지만 행복을 쫓겠다는 의지도 있다. 비록 우리는 통제를 벗어난 불행으로 인해 계속해서 어리둥절한 채로 살겠지만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은 이미 우리의 최선이리라. 우리는 오늘도 조금은 기쁘고 조금은 슬픈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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