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의 순기능
어른이 되고 아들러의 책 <열등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접했을 때 큰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열등감은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 지금 현재 위치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심지어 좋은 열등감과 적당한 스트레스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은 굉장히 고무적이었다. 덕분에 그 후로 몇 년 동안 나는 열등감의 순기능을 몸소 체험하며 ‘기꺼이 깨지고 부서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열등감은 혼자 오지 않는다. 아들러의 말처럼 열등감의 이면에는 우월감이 숨어있었다. 나는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이를 원동력으로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냈지만 이를 보상받기 위해 꿈틀대는 우월감을 통제해야 했다. 우월감의 시작은 대체로 인정욕구였고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또 다른 열등감을 찾아서 나에게 더 큰 성과를 요구했다. 다만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건 지난 몇 년 내가 받은 열등감은 오로지 나와의 비교 또는 '불특정 다수'를 통해 획득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코로나19로 인한 인간관계의 축소화 내지는 자족감(自足感)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코로나 기간에 미라클 모닝, 명상, 영어공부, 낭독, 운동, 글쓰기 등 여러 차례의 '100일 스몰 스텝'을 실천했다. 물론 유의미한 일이었다. 일단 나는 '꾸준함'에 자신이 생겼고 실제로 더 건강해졌으며 덕분에 수익형 블로그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꾸준함이 나에게는 복병(伏兵)이었다는 점이다. 그즈음 꾸준함이 만만해진 나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오만하게도 아주 작은 성과에도 몹쓸 우월감이 꿈틀거리며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은 여전히 매일 하고 있지만 내가 하는 운동은 발전이 없었다. 수영은 할 수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 결국 자유형을 마스터하지 못했고, 정보성 글쓰기에 길들여져 창작 글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몸과 마음이 기계적으로 패턴화 되어 루틴을 이루었으나 '게으른' 나의 뇌는 새로운 패턴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것이 친구들이 나의 '꾸준함'을 칭찬할 때 내가 '스스로 ' 게으르다'라고 말하는 이유겠다. 변화가 필요했다.
개인의 성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벗어나는 것이다.
-크리스틴 버틀러-
결국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올해부터 독서모임과 글쓰기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반강제성 글쓰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2022년 오픈 후 방치해 둔 브런치의 글을 지난 4월부터 꾸준히 쓰게 된 동기는 온라인으로 참여한 '21일 매력 글쓰기 소모임' 덕분이었다. 여전히 한 단계 더 오르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시가 2% 필요하다는 점이 못내 아쉽지만 인간이 사랑스러운 점도 바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위로해 본다.
이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적당한 열등감을 삶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되 우월감이 자존감에 머물도록 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은 열등감의 긍정적 진화다. 열등감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강화하는 것이겠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자칫 발란스가 흐트러지면 열등감 콤플렉스 또는 우월감 콤플렉스라는 병리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등감의 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고통스럽지 않게' 열등감을 받아들였던 이유를 떠올려봤다. 나의 열등감의 비교 대상이 '어제의 나' 또는 '부족한 나'였다는 점이 달랐다. 그 당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던 나는 나름의 작은 성취들도 얻었고 건강하게 열등감을 활용했음은 분명하지만 열등감의 순기능을 충분히 강화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들러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감정이 결합되어야만 자신의 세계에 함몰되어 범하는 큰 실수를 피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즉, 열등감의 순기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결국 타인과의 건강한 비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들러의 말을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과거를 돌아보면 내게도 건강하지 못한 열등감의 경험치가 충분히 있다. 외모, 가정형편, 학벌 등이 나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기가 죽었다. 그런데 열등감은 내가 가치를 두는 것들로 그 자리를 옮겨가기도 했다. 나는 점차 외모와 학벌, 경제력보다는 지적 능력, 재치와 인품 등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에 열등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또한 나름의 긍정적 진화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열등감은 분명 비교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열등감의 순기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건강한 비교가 불가피했다. 내가 필요한 건 나는 부족하다는 멋진 발견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점점 혼자 있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냈고 나는 또다시 깨지고 부서지고 다듬어지는 중이다. 요즘 나는 선별적으로 이전과는 달리 어렵고 낯선 도전들을 경험하고 있다. 단 뭐든 다 잘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덕분에 때론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지만 이렇게 납작하게 엎드려야 배워짐을 또 한 번 느낀다. 엄마밴드에서 키보드를 잡고 독서모임에서 스피치를 연습하며 언제나 그 자리엔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수고로움을 덜고 감사히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
한편 브런치에도 샘나게 글 잘 쓰는 분들이 많다. 다만 100인 100색, 우리는 모두 각자의 빛을 발산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실 오늘 글은 낮에 엄마밴드에서 깨지고 열등감에 찌질해진 마음으로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흐뭇하다. 헛, 흐뭇한 마음에 그 넘의 몹쓸 우월감이 삐쳐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