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꽃 Apr 11. 2024

21세기 우정론

요즘도 진정한 친구를 논할까?


친구는 중요하지만
저는 친구 사귀는 데 큰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다고
괴롭지 않았고
꿈이 더 중요했던 저는
꿈을 찾는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 강형욱-



생각해 보면 사랑과 우정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육체적인 교감을 제외하고도 모두 감정적인 교감을 통해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이 넓은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거나 소수로 지정된 친구,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특별한 사람'이니 어찌 아니 좋을까? 단 사랑의 감정이 유일한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친구는 다수와 공유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다르겠다. 물론 우정이 무엇인지 이제 갓 알 것 같은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만큼은 친구도 때론 유일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우리에겐 '사랑'과 '우정'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우정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이 너무 뻔한가. 손절하는 관계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열광하는 '열정적' 사랑은 시간과 반비례하는 반면 우정은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연인관계는 어디까지나 결혼 전까지이니 '친구'가 '연인'보다 더 좋은 이유는 이로써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결혼 전 '여사친, 남사친'을 충분히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친구의 종류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구태여 나눈다면 불혹의 나이가 지난 내게는 크게 세 종류의 친구가 있겠다. 세대별 친구에 대한 정의가 다를 수 있으니 가까스로 나이를 공개하고자 한다.


먼저, '찐친'이 있다. '찐친'이란, 말 그대로 진짜 친구로서 서로 믿어주고 언제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며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친구이다. 그 밖에도 '찐친'의 정의는 연령과 경험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친구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믿을 수 있어서 함께하고 싶고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은 공격하지 않는 관계, 그 어떤 가십에도 쉬이 동요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것 등, 무엇보다도 '믿음'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사실 그 '믿음'은 친구를 알아본 나의 안목과 선택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두 번째, '찐친'이 포함된 학교 주변 친구들이 있다. 학교 친구의 가장 큰 장점은 익숙함이다. 학교라는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성장 배경과 성격을 가진 친구들을 만난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관계는 더 쉽게 빨리 가까워진다. 그리고 매우 긴 시간 동안 함께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숫자만큼 공감대는 깊어지고 심지어는 가족과 같은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간다. 이때 친구의 과거나 배경 혹은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너와 내가 있을 뿐이다. 단, 이 경우 가족과 같은 애증의 관계로 꼬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쯤에서 한 번 강조하면, 글에서 말하는 친구는 같은 반 학우 모두를 가르키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사회적 친구는 어떨까. 학교를 떠나 맺게 된 사회적 친구는 신뢰보다는 협력관계에 가깝다. 사회적 친구는 크게 일터의 동료들과 이웃,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 있다. '닉네임'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어떨까. 사이버 공간에서의 친구는 '찐친'이 될 수 있을까? 내 답은 '있다'이다. 물론 서로에 대한 정보가 투명한 경우라야 안심이다. 그다음은 똑같이 안목과 선택에 맡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친구는 공감대가 같아 쉽게 가까워지기도 하고 이익관계가 없으니 오해도 적다. 심지어 나는 오로지 랜선에서만 교류한 20년 지기 친구도 몇 있는데 실제로 외롭거나 힘든 날 그들과 소통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때때로 약간의 호기심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매력을 상승시켜 관계는 담담하고 여유롭게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친구 중 오로지 협력 또는 이익관계로 국한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회사 동료, 아이 친구 엄마들 중에서도 물론 친구로 남는 인연이 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점차 잊힌다. 흥미로운 점은 마치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이들과도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라는 점인데 특히 아이가 저학년이었을 때는 함께 여행을 다닌 적도 많다. 그런데 이들 중 친구로 남은 이들은 소수다. 회사 동료인 경우 확률이 적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이 친구 엄마들은 왜일까?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특히 아이와 동갑내기 같은 반 엄마들과는 묘한 신경전으로 가까워지는게 어렵다. 내 아이가 잘난 것보다 오히려 좀 모자란 경우가 환영받을 수도 있고 워킹맘보다 전업맘이 더 쉽게 친해진다. 엄마들의 세계란! 갑자기 고구마 먹은 듯 가슴이 답답하니 화제를 돌려보겠다. whatever~


결혼한 후의 관계는 과거 혼자일 때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일단 가족 구성원 각각의 친구와 나는 협조적인 관계가 된다. 개인적으로 맘에 들지 않을 경우도 존중해주어야한다. 물론 친구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이 글에서 친구란 찐친에 가까운 순도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말길.  


돌아보면 나도 꽤 긴 시간 가족이 우선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친구에게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 내가 보고 싶다고 꼭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 줄 필요도 없고, 주머니가 궁할 때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좋다. 고가의 선물은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저가의 선물은 받을 의향 있다. 농담이다.


나도 어릴 땐 친구 의리 꽤나 밝히며 살았지만, 살다 보니 중요한 순간에 낯선 이웃이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돈 관계가 얽히면 친구도 좋지 않은 뒷모습을 보이더라. 부유한 친구에게는 밥 한 끼 술 한 잔이 쉽지만, 어려운 친구는 얼굴 보는 것조차도 시간적 경제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내가 넉넉해도 매번 밥 사는 것이 미안해질 수 있다. 혹자는 그런 경우조차도 마땅히 극복해야 친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것처럼 친구도 내 앞에서 만큼은 당당하고, 편안하고 거짓이 없길 바란다. 나 역시 그 앞에서 부족한 나로 서는 매 순간이 부끄럽지 않으리라. 서로 성장하고 따끔한 조언을 해주는 거창한 관계는 굳이 꿈꾸지 않는다. 진심이라면, 어렵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단 한 사람의 나를 알아주는 친구만 있어도 충분하다.'라고 중국의 소설가 노신은 말했다. 그만큼 진실한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단 말이 아닐까. 친구란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하지만 마흔이 넘으니 친구라는 말이 쓸쓸하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친구란 무엇일까? 딱히 정의할 수 없지만 함께하는 동안 다소 수다스럽다가도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 때때로 각자 자기 말만 해도 서운하지 않은 관계, 웃거나 울고 싶을 때 망설이지 않는 관계, F든 T든 상관없는 관계? 그런데 요즘도 진정한 친구를 논할까? 뜬금없이 MZ 세대의 우정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19로 나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