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지난 3월부터 참여한 엄마밴드가 어제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엄마 밴드는 베이징 다문화 센터 소속으로 종종 문화행사가 있을 때 무대에 선다. 엄마밴드의 구성원은 중국인 엄마 셋, 한국인 엄마 셋 그렇게 여섯이다. 나는 밴드에서 세컨드 피아노와 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엄마 밴드가 부른 노래는 모두 두 곡으로, 고양이의 보은 주제곡 <바람이 되어> 중국어 버전 <小手拉大手>과 한국어 노래 <걱정 말아요>이다. 사실 피아노를 전공한 단장님을 제외한 구성원들은 모두 악기를 취미로 다루기 때문에 수준이 어떠한가를 논하기는 적절치 않다. 일단 '직접 악기를 연주하여 노래하고 즐기는 수준' 이라고만 이야기해 둔다.
알랭드 보통은 책 <불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족하다는 느낌은 대체로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서 타인은 매우 가까운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범접할 수 없는 유명인 또는 연예인을 질투하기보다는 따르고 추앙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연예인이 나와 가까운 친구라면 어떨까? 실제로 밴드 활동 전의 나는 그저 노래방 수준에 만족했다면 밴드 이후의 나는 언감생심 무대 위 보컬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조금 과장해서 나는 내가 '심리적 음치'라는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음치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려고 한다. 음치란 청력손실, 지능, 인지 능력과는 별개로 음악 지각에 대한 일생적 손상으로 정의되며 인구의 약 1.5%~4%가 가진 신경 발달적 장애라고 한다. 음치는 유전적 특징을 갖기도 하며 유사한 음을 변별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노래할 때 음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음치에 대한 개념이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어떤 학자는 음치를 '노래를 틀리게 부르는 경우'라고 정의했고 또 어떤 이는 '음을 잘 못 듣거나 악보를 읽지 못하는 등의 경우'로 정의했다. 한편 음악 심리학자 레베츠(G.Revesz)는 음치란 '음과 음 간의 관계 및 음악적 현상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재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정의가 있으나 재미있는 이론은 '심리적 음치'라는 개념인데 생리적 음치-신체 기능 저하로 음치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이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심리적 음치란 기준과 범위가 매우 복잡하지만 생리적 음치와는 다르게 잠재적 음악성이 내재된 경우로 음악 교육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지도를 받음으로써 가창 능력이 바르게 개발되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특히 음악적 트라우마, 예를 들어 어릴 적 노래할 때 무안을 당했거나 본인 스스로 자신감이 심하게 결여되어 노래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면서 음치가 되는 경우도 이에 속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치가 존재한다니 매우 흥미롭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음치'일까? 밴드 공연이 있기 전 나는 연습 영상을 음악 전공자인 딸아이에게 보여줬다. 딸아이는 영상을 보고 듣는 내내 매우 재미있는 표정들을 지었다. 타악기 전공자인 아이는 드럼 소리에 괴로워했고 일렉 기타의 엉성한 스트로크에 귀를 막았다. 무엇보다도 엄마인 내가 노래하는 타이밍에서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고 결국 한 마디 내뱉고 말았다. "엄마, 음정이 틀렸어." 내가 "어디가?"라고 물으니. "다, 다 틀렸어."라고 말하는 아이. 공연 이틀 전 나는 멘붕 상태에 빠져버렸다.
물론 보컬 트레이너가 내게 '음치입니다'라는 진단을 내린 건 아니다. 아이 역시 내가 생리적 음치는 아니라고 했고 음정이 틀렸다기보다는 모든 음정이 불안정하다고 정정했다. 이 부분은 한참 설명을 해 준 덕에 이해가 가능했고 이제야 나는 내가 '심리적 음치'였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 글에서도 썼지만 나는 어릴 때 노래를 곧 잘 불렀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었다. 그때부터 타인 앞에서 노래할 때면 심리적으로 위축되었고 목소리가 작아져버렸다.
구체적으로, 나는 소리를 낼 때 1. 음정을 정확하게 꽂지 못했고 2. 불안정한 호흡으로 한 음정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으며 3. 대략 반음씩 틀리는 경향이 있었다. 반주가 있을 때는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미비한 정도지만 무반주로 노래할 때는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음정으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우. 놀라운 사실이었다. 충격적이었지만 다행히 더 많은 부분이 호기심으로 채워졌다. 아이의 설명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떻게 음정이 틀리는지 알아갔고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개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었다. 한 가지 더 안심했던 건 아이는 그나마 내 음색이 들어줄 만하다고 한다.
이어 아이의 짧고 강열한 보컬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딸아이는 평소 덤벙대지만 전공분야에 있어서는 매우 꼼꼼하고 엄격한 편이다. 아이가 나에게 제안한 건 보컬 피치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음정측정어플로 내 음정이 맞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음정측정어플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나는 무료 어플인 Sound corset를 이용해 봤다. 기타 튜닝 할 때 사용하는 것과도 같다. 초단위로 내 음정을 확인하고 측정해 주는 어플이다. 어플을 사용하며 나는 역시나 좌절했다. 음정을 정확히 맞추는 것도 어려웠고 몇 초 동안 한 음정에 머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나를 보며 딸아이는 자신있게 시범을 보인다. 이게 된다고??
이러한 일련의 경험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지난 몇 년 '혼자 있는 시간'에 집중하며 대외 활동을 줄였던 나는 집밖으로 나오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다시 와장창 깨지고 부서지는 시간을 갖는 중이다. 다만 이번에는 내공이 생겼다. 부서지는 건 힘겨운 면도 있지만 그보다 소중한 시간으로 느껴진다. 도전이 없다면 좌절도 없고 도전을 한다면 실패는 없다. 나는 나를 어떤 준거집단에 놓을지만 결정하면 된다. 사실 이 말은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과는 다른 평면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잘할 필요가 없고 선택적으로 시간을 배분하여 최선을 다 하면 그만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모든 과정을 즐기되 종종 건강한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것이겠다. 이제 나는 나의 준거집단이 노래방에서 밴드로 승격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다시 브런치 이야기, 4월 정식으로 브런치를 시작하고 두 달 경과, 처음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브런치에서의 소통이 늘어가면서 나는 점차 다양한 심리상태를 경험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내용에 중복되지 않게 오늘은 조금 다른 포인트를 짚어보려고 한다.
브런치 작가 소개에도 쓰여 있듯이 나는 치유를 주제로 글을 쓴다. 나를 포함해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마음의 휴식과 치유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건 그들 중 다수는 여전히 '나는 괜찮아'를 외치거나 '네가 뭔데'라고 방어하며 굳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나도 그랬고 여전히 나에게는 '회피'라는 방어기제가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에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지나치길 바란다. 마치 내가 지나치는 그들을 붙잡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나는 이런 류의 글과 말을 무척 불편해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노파심에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본다.
문득 이번 엄마밴드 공연 때 무대 위에서 유독 활발히 움직이는 내 모습을 보며 딸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 무대에서 너무 긴장했네. 제일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마치 엄마의 긴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버하는 것처럼 보여. 다음엔 조금 릴랙스 했으면 좋겠어요." 100% 인정! 나는 딸아이의 말이 맞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알아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치유의 글이란 어떤 글일까? 뭐 대단하거나 확실한 효과를 기대한다는 건 터무니없다. 100인 100색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니즈는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심지어 심리상담에서도 상담사보다는 내담자의 적극적인 치유의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그저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잠시 머물다가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좋다. 무엇보다도 '치유'의 첫 번째 대상은 '나'이기 때문이다. 즉, 내 이야기가 거울이 되어 타인을 비춰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크고 작은 과거로부터의 트라우마, 내가 선택할 수 없었고 끊어낼 수 없는 원가족으로부터 시작된 고통의 대물림, 평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2차 감정들을 부족하나마 누군가 내 글을 통해 끄집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아픈 곳을 보여줄 때, 비슷한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딱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고 알고자 하는 만큼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어떤 '훌륭하다'고 소문난 글을 보고도 때때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글쓰기와 소통은 나를 알아가고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 심지어 글을 쓰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내 생각과 마음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종교를 접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모두에게 각각의 소명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소명이 나와 사람을 치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능력의 한계가 있을 뿐 나는 그저 그렇게 쓰이고 싶은 사람인 거다. 여기까지가 분명히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취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쉬운 글', 가독성이 좋고 어렵지 않은 언어들로 쓰인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브런치 안에서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가들을 대하며 나는 문득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이 어떤 글이었는지 잠시 잊고 말았다. 평소 동경했던 미학과 예술분야에 글을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맛깔나게 써내는 작가들을 보면 감탄했고 부러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고 곱씹고 정돈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턱없이 부족한 건 지식과 경험이라고 생각했고 브런치 안에서는 소수지만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작가를 종종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점점 마음이 쪼그라들면서 어떤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모두가 좋아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는데 잠시 흔들린 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모두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쓸 수는 없다. 마치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고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원하는 치유의 글을 써야겠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건 본질에 관한 정의이다.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학교 3학년 때쯤 취업준비를 위해 읽었던 자기 계발 서적에서 '본질은 쪼갤수록 사라진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읽었던 책에서는 '본질은 쪼갤수록 분명해진다'라는 주장을 본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나는 이제 본질의 양면성을 받아들일 수 있고 심지어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다른 속성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본질은 쪼갤수록 사라지고 또 어떤 본질은 쪼갤수록 분명해진다.
노래와 글쓰기에서도 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는데 둘 다 옳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는 거의 모든 논리가 편의를 위해 이분법적 사고로 주장되곤 하지만 사실은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진리란 없다. 1+1이 2라는 결론은 '페아노 공리계'의 결과일 뿐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어쩌면 인간의 심리적 안전감을 찾기 위한 본능일 뿐이다.
나는 오랜 시간 도예가가 참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다. 얼마 전 보았던 도예가 장재녕 씨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만드는 도자기 하나하나가 한 명의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흙을 대할 때 짜증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짜증이 고스란히 흙에 배어들어 가기 때문이라니 문득 도자기를 굽는다는 일이 마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처럼 경이롭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기꺼이 깨지고 부서지고 다듬어지는 중이다. 브런치 안에서 내공이 깊은 작가들의 글을 보며 수없이 깨지고 있지만 모든 글쓰기가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과 독자로써 내가 읽고자 하는 글에만 나는 욕심을 낼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글쓰기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쓰이는 시간과 노력은 매우 값지고 의미 있는 것이니 천천히 즐기고 꾸준히 이어나갈 생각이다.
엄마밴드와 음정에 대한 생각들은 나에게 너무나 큰 인사이트를 주었다. 모든 음이 부정확하지만 틀리지는 않다는 딸아이의 말을 통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실이 어쩌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의 끝은 역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완성된 글쓰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얻어가는 것이 더 많으리라.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글쓰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