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네 탓'에서 '탓'은 일이 잘못되거나 부정적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한 원인을 가리킨다. 즉, 네 탓은 '너 때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자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걸 뜻한다. '네 덕'과는 상반되는 의미이다. 그럼 우리는 언제 '탓'을 하게 될까? 어떤 일이 잘 못 되고 그로 인해 슬픔,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을 때 원인을 찾게 되는데 이때 '내 탓' 또는 '네 탓'을 하곤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 호텔에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전체회의가 있던 월요일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꼼꼼하게 노트와 펜을 챙겨갔는데 회의 기록을 맡은 비서가 펜을 안 가져와 당황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펜을 건네주고 말았다. 결국 길어지는 회의시간 내내 나만 빈손으로 멀뚱멀뚱 상사 얼굴을 쳐다봤고 심지어 회의 끝에 나는 펜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당시 나는 그러한 불편한 상황이 내 탓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내가 나서서 빌려주지 않았으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내재화(introjection)라고 한다. 이는 방어기제의 하나로 과도한 자기 억압 또는 억제를 통해 일어나는데 외부에서 보기에는 마치 좋은 사람 같아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내 탓'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무조건 사과하거나 넘어가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마음의 병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제 아무리 성인군자이고 성숙한 방어기제인 이타주의를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네 탓'을 하는 건 어떨까?
'내 탓' 보다야 '네 탓'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자녀가 엄마에게 다음 날 아침 6시에 꼭 깨워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알람 맞춰놓는 것을 잊었다고 해 보자.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사춘기 아이는 6시 반에 일어나 엄마 탓을 하며 불같이 짜증을 내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이에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지난밤 "네가 시간 맞춰 일어나"라고 말할 것을 하고 후회가 된다.
'내 탓'으로 마음이 병들 바에야 '네 탓'이 낫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남의 탓을 하는 것 역시 심리학에서는 투사, 합리화, 회피 등의 방어기제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자책을 피하기 위해 책임의 화살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다만 습관적으로 남의 탓만 하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이 지배적이게 되고 결국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네 탓'과 '내 탓' 모두 건강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일까?
분명 책임의 화살을 무조건적으로 자신 또는 타인에게 돌리는 것은 모두 정신건강에 해롭다. 특히 '내 탓'을 하는 사람을 '네 탓'을 하는 이 보다 성숙하게 보는 사회풍조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한 생각이 더 많은 '내 탓'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과 결과, 변수까지 고려했을 때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어느 쪽이든 '탓'이 아니라 '때문'이라고 해야 맞다. 그저 원인일 뿐 부정적인 감정 또는 원망을 담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상황 또는 결과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에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우리가 성숙하지 못 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조금 넉넉한 마음을 갖고 균형 있는 감정표현을 통해 원인과 대책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