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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Jun 17. 2024

마음의 맷집을 왜 키워?

회복탄력성의 오해


언젠가부터 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힘든 일을 똑같이 겪어도 사람마다 괴로움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때 역경을 성공적으로 훌훌 잘 털어내는 사람을 우리는 회복탄력성이 좋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을 꽤 많이 사용했고 심지어 좋아했다. 나는 회복탄력성이 의지로 조절된다고 생각했고 누구나 노력만 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문득 이 역시 '잔혹한 낙관주의'의 일부가 아닐까 우려된다. 기본적으로 '똑같이' 힘든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문득 회복탄력성을 회복탄력능력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은 각자 괴로움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회복하는 속도와 탄력 역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기질을 어찌할까. 우리는 모두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민감한 것도 둔감한 것도 각각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대 얻어맞고 오랜 시간 쓰러져 일어서지 못할 수도 당장 일어났으나 속병이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이를 판단할 것인가?


이쯤에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면, 나는 회복탄력성이라는 마음의 맷집을 키워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회복탄력성이 잔혹한 낙관주의처럼 제 기능을 못 할 경우 오히려 뾰족한 화살이 자신을 향하여 내상을 입힐 수도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것은 마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야 비로소 맷집이 생기는 건 아닐까? 맷집을 키우기 위해 우리 모두 복싱 선수를 닮아야 하는 걸까?


마찬가지로 회복탄력성은 과거 역경을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기능인가? 마치 수차례의 실패로 녹다운된 경험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처럼 느껴진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회복탄력성이 낮고 갖은 고생을 했던 인생은 회복탄력성이 높다는 결론이다. 어딘가 미심쩍다.    


이번에는 회복탄력성의 일부인 갈등회복력으로 범위를 좁혀보겠다.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단언컨대 우리 중 누구도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임과 동시에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갈등은 지혜롭게 해결 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똑똑하거나 선량한 사람에게도 갈등은 생긴다.


다시 한번 되묻는다. 마음의 맷집은 키워야 할까? 마음의 맷집은 키워야 한다. 단, 그전에 우리에겐 할 일이 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느 정도의 맘 그릇을 가지고 있는지, 맘 그릇의 형태는 어떻고 어떤 주기로 비워줘야 하는지. 담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종류이며 어느 정도인지. 내가 느끼는 괴로움의 정도와 민감도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편 갈등회복력이 강한 사람은 자아확장력이 높다고 하는데 자아확장력이란 나와 타인이 연결되어있다고 느끼는 정도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역시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를 아는 것과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오로지 회복탄력성에만 집중한다면 회복에 실패할 경우 자칫 자책에 빠질 수도 있다. 예민함은 결코 열등함이 아니다. 괴로움에 대한 민감도로 우월을 가릴 수는 없다. 우월을 가리기 위해서는 목표가 같아야 하는데 이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도마뱀처럼 오로지 생존에만 급급한 생물이라면 어땠을까? 인간은 생존과 위험, 애정과 존중의 욕구를 넘어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고등생물이다. 그런 이유로 우월감은 오로지 자신으로부터 기인할 뿐 타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라고 했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는 우리 인간에게는 왕왕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술가가 영혼을 불태우며 작품활동에 몰입할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일종의 자아실현 욕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비단 예술가에게 국한된 감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인간은 모두 예술가이고 삶에서 다양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아이를 낳는 과정도 나는 예술의 승화처럼 보이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출산의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죽지 못하는 고통'이라는 생각도 든다.


왜 갑자기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다가 자아실현 욕구 이야기가 나왔을까? 인간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각자의 민감도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묻고 싶다. 민감도를 포기할 것인가? 덜 민감하면 덜 아프다면 민감도를 포기할지 나는 문득 궁금하다. 매슬로의 인간욕구 5단계인 자아실현을 이룬 인물은 극히 드물며 굳이 예를 든다면 테레사 수녀, 간디, 예수, 석가모니 등 범접할 수 없는 성현들을 포함한다. 즉 대체적으로 인간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욕구를 갈망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 인간은 민감해서 더 아플지라도 욕망하는 것이 채워진다면 기꺼이 더 고통스러운 쪽을 택하기도 한다.


더 민감하고 더 고통스러워도 더 잘 극복해 나가는 인간 부류도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물다. 반대로 고통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서 오히려 더욱 창조적인 성과를 만들어 낸 위인들도 많다. 고통에 익숙한 사람일지라도 고통의 '의외성'과 '가변성'을 온전히 감내하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하기도 하다. 하물며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도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회복탄력성 또는 낙관주의의 부재만으로 인간을 나약함을 탓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하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 맞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나는 회복탄력성 또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부정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정리하면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먼저 알고자 했으면 한다. 낙관주의 역시 필요하지만 누구를 위한 낙관주의 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이제는 회복탄력성에 대한 오해를 풀고 진정한 회복력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초부터 탄력이란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려는 힘'이다. 본래의 우리가 누군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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