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쓰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by 바람결

빗소리는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오늘은 반갑게도 비가 좀 비답게 내렸다. 세상을 한바탕 씻어내겠다는 듯 시원한 기세였다. 그 덕분일까. 나는 오랜만에, 주변을 관조했다. 평소엔 감흥 없이 지나갔던 길목과 나무, 건물들이 비에 젖으며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듯했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풍경은 꽤나 즐길만하다.


비에 젖은 것들은 제각기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먼지와 발자국에 덮여있던 길가의 타일들은 물을 머금고 다시금 자신의 빛깔을 뽐내고, 풀들은 물을 만나서인지 어둡지만 생생한 푸름을 띤다. 신기했다. 평소엔 먼지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비만 오면 여길 보라는 듯 내 시선을 잡아끈다. 비 오는 날이면 마주하게 되는 이런 소소한 발견들이, 나는 퍽 반갑다.


참 웃긴 일이다. 결국 비가 세상을 씻어내 주변을 어둡게 물들이면, 오히려 제 빛을 숨기던 것들이 선명해진다. 반면 우리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안달하던 화려한 것들은 빗속에서 힘없이 침묵한다. 밤거리를 수놓던 총천연색의 간판도, 현란하게 명멸하던 광고 스크린도, 지금 내 발밑 타일의 고결한 묵빛을 이겨내지 못한다.


결국 본연의 진가는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허장성세로 점철된 것들은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하면 그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스스로 진실되게 쌓아오지 못한 것들은 비바람 한 번에 씻겨 내려갈 허황된 칠에 불과하다. 묵묵히, 때로는 고독하게, 인고의 시간을 버티며 자리를 지켜온 존재들이 가진 강인한 무채색의 빛깔을, 요란한 장식물들은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무채색을 사랑하고 싶다. 눈을 멀게 하는 빨강, 노랑, 주황이 아니라, 차분히, 묵묵히 자신만의 묵빛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비가 내리는 시련의 날이 아니어도, 그 깊은 빛깔을 미리 알아봐 줄 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


지금 나는 어떤 빛을 띠고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안식과 신뢰를 주는 묵빛의 사람일까. 왠지 오늘은 들이치는 빗줄기에 젖어보고 싶다. 우산을 쓰고 싶지 않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