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만큼 찐 스승이 또 있을까?
나는 시어머니가 나를 며느리를 본 나이보다는 열 살이나 더 많고, 우리 엄마가 나를 시집보내던 나이보다는 다섯 살이 적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내가 결혼했던 나이보다는 더 나이가 많다.
엄마는 뭘 해도 똑 부러졌었다. 시집을 와서도 30년이 지나서야 찰떡을 각 잡아 썰어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손님들이 다녀간 후에 덮었던 이불들 홑청을 불리해서 빨고 풀을 먹여 밟고 다듬이질을 해서 갈무리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해 본 것도 시집을 오고 아이를 키우고 내 몸 관절들이 슬슬 아프기 시작하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엄마는 인절미를 썰어도 각을 잡았고, 이불을 개도 각을 잡았고, 그 흔한 파를 다듬어도 각을 잡아서 까고 씻고 요리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재래식 부엌에 엎어놓은 투가리(뚝배기)며 부뚜막에 올라앉은 무쇠솥들은 크나 작으나 반짝반짝 윤이 났었다. 힘들 법도 한데 엄마는 그 어두침침하고 오종종한 부엌에서 요술처럼 반찬이며 떡이며 밥을 해 내놓았다.
엄마 사랑이라는 것이 촌스럽기 짝이 없어서, 무조건 뭘 해서 먹고 먹이고 싸 보내면 그것으로 족한 양반처럼 보였다. 멀미를 해서 얼굴이 노랗게 떠서 얼굴만 둥둥 뜬 허깨비처럼 늘어져 집에 내려가도 엄마는 무조건 상다리 부러지게 나물이며 푸성귀를 올려 밥상부터 들이밀고는 했다. 어떨 때는 생김으로 끓여낸 국이 역겨워, 어떨 때는 조개 전, 굴전이 비위가 상해서, 어떨 때는 청국장 쿰쿰한 냄새에 , 어떨 때는 여물 냄새나는 묵나물에 한 멀미를 또 하고는 했다. 제발 좀 그만하라고 해도 엄마는 그 누구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뚝딱뚝딱 부엌에서 요술을 부리고는 했다.
먹기 전까지는 다이어트가 어떠네, 저떻네 불평불만을 하지만 일단 젓가락 숟가락질이 시작되면 엄마 밥상 앞에서는 세상의 어떤 이유도 다 허사였다. 그냥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봤다.
그런 내가 경상도로 시집이란 것을 왔다. 대부분 데치고 볶고 쪄서 반찬을 하는 충청도와는 달리 날것으로 먹거나 겉절이를 하거나 멸치젓에 머무려 먹는 이곳 반찬도 먹기 힘들었지만 밥상운 늘 입으로만 차리는 시어머니는 더 힘들었다.
식구든 손님이든 오면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였다. 뭘 특별히 준비를 한다거나 한 경우도 없지만 외부 일로 바쁜 시어머니 밥상은 늘 내 차지였다.
한 30년을 그러고 나니 이제야 엄마 밥상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라고 늘 집에서 부엌 살림에 꽃놀이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우리만큼 밭농사 논농사가 많았으니 평생을 일구덕이에서 허우적거렸을 것이 뻔하다. 나는 엄마가 늘어지게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늘 뭔가를 하다가 쪽잠을 자고는 움직였다. 누군가 엄마를 보러 오면 논으로 밭으로 하우스로 찾으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 엄마가 푸진 밥상을 차리기 위해서 얼마나 동동거렸을까를 생각하면 이제야 목이 멘다.
나는 요즘 밥을 두 주 정도에 한 번쯤 하는 것 같다. 말년에 무슨 복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은 제 밥벌이하러 도시로 나가고 남편은 기숙학교로 발령이 나니 저녁까지 먹고 온다. 나는 나대로 일이 바빠 초과 근무를 하는 날들이 많다 보니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주말 말고는 딱히 없다. 그러니 한 솥 돌려 냉동을 해 두면 2주는 먹는다. 그러다가 아이들이라도 오면 몇 시간씩 부엌에서 그 옛날 엄마처럼 동동거리고 아이들 잠자리 봐주느라 부산을 떤다.
오늘은 딸아이 늦은 생일 상을 생각해서 미역국을 끓였다. 우선 미역을 쌀뜨물 받아서 불리고, 조갯살 해동해서 국물내고 쇠고기 다져서 볶고, 다시 미역 넣어 달달 볶아서 뭉근하게 30분 정도 끓여뒀다. 바쁘다고 센불에 팍 끓여내면 국물은 국물대로 쫄고 미역은 미역대로 억세진다고 반드시 뭉근하게 끓여내야 한다고 했었다 엄마가.
다음으로 시골집에서 따온 엄나무 순 데쳐서 된장에 버무려 팍팍 묻혀내고, 엄마는 이것도 쓴나물류기에 된장 낫잽이 넣어 팍팍 무쳐내라고 했다. 묵은 갓김치 배추김치, 백김치는 반드시 손님이 오면 속 것으로 꺼내 썰고 두어 숟가락 국물을 얹어 마르지 않도록 덮어두었다가 내라고 했기에 썰어서 마르지 않게 냅씨워 다시 냉장고 넣었다.
그 흔한 마요네즈도 없으니 소스를 참깨 절구에 찧으면서 볶아놓은 땅콩 넣고 매실 진액 떠와서 간장과 사과즙 내서 혼합하고 생겨자 넣어 소스 완성했다.
딸기와 토마토 외에는 샐러드 재료가 없으니 달걀이라도 삶아야겠기에 달걀 삶고 대충 샐러드도 완성했다. 달걀 삶을 때 숟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려야 이쁘게 삶아진다고 했는데 그걸 뱅뱅 돌릴 시간이 없어 타이머 돌려놓고 밥짓기 시작했다. 콩 대여섯 가지 불린 것, 밤 까놓은 것, 6년 근 삼 채 썰어 놓은 것 넣고 밥을 지으면서 도토리가루 5, 메밀가루 3, 감자가루 2, 반건조오징어 채 썰고, 국물내고 건져놓은 조갯살 다져 넣고 달걀 2개 넣고 부침개 재료 만들어 부쳤다. 우리 밥상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다음으로 할 두어 가지를 반드시 미리 머리 속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제 시간 안에 밥 먹기는 어렵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머리로는 도대체 몇 가지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간단한 아침상을 보는 데도 7시 10분부터 9시 30분까지 했다. 김치 냉장고에서 김치며 장아찌 내놓는 것도 일이고, 안 깔던 상보 내서 까는 것도 일이고, 안 쓰던 수저받침 꺼내서 세팅하는 것도 일이다. 조금은 이쁜 그릇으로 세팅하기 위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릇그릇 꺼내 담는 것도 일이고, 물 잔 받침대에 쟁반 받쳐내는 것도 일이다.
밥 하는 것만 일인가? 먹고 남은 음식 처리며, 나왔던 그릇 다시 제자리에 넣는 것도 다 일이다. 일치고는 고된 일이다.
아이들이 쿨 때는 직장에 있을 때가 오히려 몸은 편했었다.
몸은 몸 대로 되고 마음은 마음대로 시험문제도 다듬어야 하고,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당장 월급 받으면서 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로 불안하다. 머리 염색도 좀 해야 세월 허옇게 내린 나이도 감출 수 있으니, 이렇게 소꿉놀이 하며 하 세월 보내는 것이 편치만은 않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어지간하면 식당에서 해결하고 싶다. 마음이 안 편하다.
우리 엄마라고 안 그랬겠나!
세월이 엄마 나이 언저리만큼 나를 데려다 놓고 나서야 알았다. 밥은 결코 사랑이 아니면 못 한다는 것을. 우리 엄마가 '나는 할 만큼 했다.'라고 탕탕 호기롭게 큰소리 칠만 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과 줄다리기하는 우리 인생에서 내 살 아닌 다름 사람 살을 위해 몇 시간씩 붙들려가면서 10여분이면 쫑 날 밥상을 차려낸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임을 이제야 몸으로 깨닫는다.
명절날 아이들 앞세우고 가면 '나 아무것도 준비 안 했데이~'가 18번인 우리 시어머니가 어쩌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까짓 것 10분도 안 돼 쫑 날 일을 길게는 몇 날 며칠을 걸려서, 짧게는 몇 시간씩 걸려서 중노동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피는 못 속이는지 나도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 이제 엄마처럼 찰떡을 반듯반듯하게 썰어낼 줄도 알고, 손님 이부자리 말쑥하게 정리할 줄도 알고, 마치 그게 다인양 밥상 그들먹하게 차려낼 줄도 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에게만 못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었음을 알 게 하고는 멀리 간 사람, 딱 한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차려낼 수 없음이 참 애달프다. 무엇인가를 깨닫는 자리에 서면 늘 엄마가 어릿어릿한다. 잘못한 것이 참 많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