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이었으면 더 좋았었을 걸!
두 주도 못 피울 꽃을 그리도 먹터지게 피운다. 부슬부슬 내린다.
꽃들이 그 부슬거리는 빗방울도 이기기 힘든지 목을 땅까지 꺾어 간신히 견뎌내고 있다. 얼굴 솜털을 쓸던 살랑바람이 오후 들어 휘휘 몰아치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앞산이 바람결에 우수수 일어서서 양팔을 사방으로 흔들어 재끼는 소리가 귓바퀴에 가깝게 다가선다. 마치 사직구장 야구 관람객처럼 일시에 우두두 일어서 냅다 아우성 한번 치고는 납작 의자에 앉고 서기를 반복하는 구경꾼들처럼 앞산이 들썩거린다.
바람 등에 업힌 초록이 꽃등에서 내려앉아 제자리를 찾는 모양새처럼 보인다. 흥미롭고 일렁거리는 초록이 그대로 눈과 코와 입 안으로 들어와 명치에 쌓이는 듯하다.
이게 그리워 세탁기 위에 빨래며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며 책이며를 뒤로 하고 여기에 온 것이다. 기쁘다. 눈과 귀와 목이 진진초록으로 물들어 박하사탕이라도 문 것처럼 시원해진다.
모란을 본다는 핑계로 어제오늘 이곳에 진을 치고 있지만 정작 모란은 목젖 한번 보이도록 웃질 않는다. 비 때문이리라. 넙데데한 꽃잎들이 꽃술을 덮고 힘을 안 쓰는 것인지 못 쓰는 것인지 웃을 기미가 없다. 길면 2주 짧으면 열흘 정도 겨우 화려한 청춘을 보내고는 볼품없이 뒤꼍만 51주 정도를 뒷방 늙은이처럼 구불텅구불텅한 모양으로 지키고 있을 신세가 딱해 그 곁에서 그 화려한 청춘을 함께 하고자 했건만 마음뿐이다. 때를 못 맞 춘 덕에 올해는 남편이 맞춤하게 가서 핸드폰에 가둔 청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게 생겼다.
군불을 지폈다.
달팽이 집처럼 오종종한 집을 와사라고 했던가!
180 남편과 167 내가 편하게 누우면 더도 덜도 없이 딱 맞는 공간이니 내 팔뚝만 한 장작 다섯 개비만으로도 아랫목은 쩔쩔 끓는다. 그 위에 파쇄된 종이 부스러기를 아궁이 가득 채워두니 은근히 타는지 뜨끈뜨끈하다. 이 좁은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본다.
팬지꽃차. 맛보다는 물색에 반해 가꾸고 따고 덖는다. 꽃차를 덖고 땅콩을 볶아내고 커피를 내려 목을 축이고 …. 뒷집 소가 목울대를 울려 울멍울멍 소리를 내면 때가 된 듯하여 밥을 해 먹는다.
이렇게 살까?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오늘이다. 애써봐야 모란꽃이 열흘을 넘기기 어렵고, 목숨 걸고 버텨봐야 그 무수한 봄꽃들도 때가 되면 초록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하고 그림자도 비치지 않던 개구리 엉멍구리떼가 못자리 물을 채우면 세상 떠메고 갈 듯 울어재끼 듯 그냥 오고 가는 사물들의 한 모양새로 그럭저럭 살다가도 되지 않을까?
비도 오고
그 비에 살 부풀려 떡가루처럼 포실해진 땅에
오늘도 나는 울타리콩이며 옥수수며, 오이, 호박, 등등을 심었다.
심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고 크고 자라는 것은 하늘 몫이니 그것마저 안 하면 너무 염치가 없어 최소한의 노력을 세월 흐름에 보태본다.
쑥이 벌써 한 뼘이나 자랐다. 내가 고라니 보고 놀래야 하나, 아니면 고라니가 놀래야 하나? 암튼 새벽 일찍 산에 나온 나를 제일 먼저 반긴 애는 쑥이 아니라 고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