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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말 무늬

by 이미숙

유모차에 몸을 걸치고 집 앞을 다니는 노인들의 짓무른 눈가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읽힌다. 내 속에 감춰진, 삶을 꾸려나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난관에서 받는 두려움과는 질이 다른 두려움 같으나 딱히 표현해 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갓 모를 낸 논둑에 앉아 있는 농부의 짓뭉개진 눈도 예외는 아니다. 논이 몇 천 평이라고 힘주어 말을 하는데도 입에만 힘이 가는지 눈은 향방 없이 떨리기 일쑤다. 회색빛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심장의 진동이 온몸에 전달되는 듯

눈가, 입가, 손끝. 모서리란 모서리는 죄다 떨린다.

목소리조차 손잔등 깊은 골처럼 주름져 떨린다.

모낸 논, 얕은 물처럼 전율하던 농부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논두렁을 급하게 빠져나오려는지 양옆으로 자축거리며 걷는다.

아롱아롱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오뉴월 엿가락 같은 아스팔트 농로가 농부의 바지자락을 붙들었을까?

지팡이로 따각따각 힘차게 길을 접어도 노인은 쉽게 농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립문 등지고 시원한 유자차 한 잔 들고 기다렸다.

‘들어갈까?’ 싶은 마음을 대여섯 번 접고 나서야 농부가 내 앞에 섰다.

반도 펴지지 않는 왼손에는 이름 모를 풀포기들이 한 줌 그득하다. 예뻐서 정원에 심으려고 캐 오신다고. 입가에 게거품을 슬쩍 닦는다. 손에 흙이 염색천 얼룩지듯 얼룩덜룩 분칠을 했다.

눈에는 눈곱이 달리고, 코에는 맑은 콧물이 나왔을까? 코딱지가 허옇게 말라붙어 있다.

양 입가에는 게거품 흔적도 보인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몰골이다.

측은함보다 먼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앞을 달린다.

농부의 비틀려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는 연신 불퉁스럽고 쉰내 나는 말들이 띄어쓰기 없이 이어졌다.

목소리마저 늙는지 구불텅거리는 톤이지만 묘하게 일직선으로 줄줄 새는 말들은 꼬리마저 희미해 알아듣기 힘들다. 몸을 농부 쪽으로 기울여 봐도 일그러지고 뭉툭한 언어들을 알아듣기는 어렵다. 순간 구멍 난 쌀자루에서 쌀알들이 무의미하게 흘러나오는구나 생각했다.

농부에게 가까이 머리를 붙인다. 순간 농부의 몸에서 소똥 냄새가 난다. 고약하다. 다시 몸을 농부로부터 떼고 내 발끝에 눈을 고정하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린다. 사람도 오래되면 몸기름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했다. 냄새마저 늙는다고 생각하니 남일 같지 않아 떨군 목이 자꾸 어깨로 주저앉는다. 비로소 내 눈도 농부 눈처럼 떨리기 시작했고, 그 파동 사이사이 두려움이 박이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알고 싶지 않은 두려움!


비로소 알 것도 같다.

어느 순간에는 말이 그리는 무늬를 봐야 할 때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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