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낳은 놈이 욕심내서 농사를 뭐 그리 많이 짓냐며 이죽거리던 아버지의 친구 놈 집으로 핏덩이 막내 동생을 안고 그 잘난 네놈의 아들과 바꾸자고 사립문 밖에서 부르부르 떨리는 음성으로 핏발 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아버지의 고독을 마주하던 순간이며,
그리도 곱다고만 생각하던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 무덤에 덮인 뗏장보다 더 질기게 일에 집착하던 모습을 목도하면서,
남들은 모두 빼입을 대로 빼입고 학교에 왔는데 우리 엄마만 분홍색 한복을 입고 고등학교 생활관 실습을 왔을 때,
결혼식장에 5촌 아재 손을 내가 잡고 들어갈 때,
동생 시부모들이 내게 와서 부모 대신 으름장을 놓을 때,
워킹맘으로 정말 정말 쉬고 싶어 집에 갔는데 다시 일이 줄 서서 기다릴 때,
시부모로, 친정 엄마로, 식구들로 마음이 터져나갈 때.
얼마나 다시 태어나고 싶었나!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기가 너무 버거워 일산 바닷가에 신발 모두어 벗어놓고 찰방찰방 발에서 종아리로, 무릎으로 차오르던 물보다 더 차게 울면서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나가지고 이렇게 '쪼다같이 살다가 가야 하나?'를 아무렇게나 바다에 패대기치던 때도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억억대고 물어봐야 답도 없는 질문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어느 날엔가는 그놈의 생각이란 놈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좀 편하게 살아질 것 같았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른다. 태어난 이유를 모르니 살아가는 이유 또한 모른다. 답답할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생각할수록 지치는 질문이다. 아마도 답을 끝끝내 모른 채 이 삶을 종료하지 않을까도 싶다. 바람이 있다면 그 질문 끝에 더 이상 두렵거나, 답답하거나, 초조하지 않을 즈음해서 이승의 삶을 깔끔하게 종료했으면 하는 것뿐이다.
이런 시를 마주하면 눈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차오른다. 덩달아 가슴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환해진다.
이런 시 말이다.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삵괭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 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 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짚 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크낙산의 마음(김광규)'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존재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이 생긴다.
이제 내게 질문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대신 나처럼 몸만 가지고 살아가는 길고양이에게 밥 한 숟가락 더 건넨다.
풀 한 포기 뽑으며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고, 새집에 모이 한 줌 더 주며 눈 똥그마니 뜨고 살피고, 개징개징하게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와 함께 하늘을 마주하고, 매일매일 텃밭에서,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