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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내 운명의 주인은 난가?

by 이미숙

나는 우리 집 여섯째 딸!

바로 위 언니와 중고등학교 시절을 공유했을 뿐, 위 언니들과 는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다. 큰언니는 늘 벽에 걸려있었다. 색 바랜 흑백 사진 속 곱기도 촌스럽기도 한 신부. 큰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네 아이의 엄마로 고두밥을 참 잘 지어줬고, 나에게 말을 시키거나 걸거나 한 기억이 없는, 언제나 말없이 귀신처럼 미끄러지듯 일하던 언니, 한 번도 크게 웃거나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 없이 논 가운데 둠벙처럼 고요하던 언니, 대문 곁 발바리처럼 동네방네 아들도 됐다가 오빠도 됐다가 사위도 됐다가, 뭐가 그리 좋았던지 늘 신나고 재밌고 바빠 보이는 형부라는 사람 곁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던 기억 외에는 없다. 그래서 큰언니는 눈치가 좀 보이는 어려운 언니였다.

둘째 언니와 같이 산 기억은 없다. 언니 시집가는 날 장롱 열쇠를 깜빡했었는지 어른들이 가기는 그렇고, 너무 어린 동생들 보내기도 그랬었는지 엄마는 알록달록한 복주머니에 열쇠를 넣어 쥐어주며 몰래 언니를 주거나 형부를 주면 된다고 했고 주자마자 후딱 오라며 날 보냈다. 징징 댄 기억은 없다. 그냥 별 고민 없이 동네를 건너갔던 것 같다. 아마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그래도 언니가 꽃가마를 타고 가던 모습이 신기해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던지, 아무튼 꼭 쥐고 언니네로 갔던 기억이 난다. 동네 겁쟁이였던 나를 알아본 것은 형부도 아니고 동네 아는 분도 아니고 언니 친구들도 아니었다. 하필 언니네 아랫집에 살던 '미친댕이'였다. 대뜸 내 멱살을 잡고 죽이네 살리네 육두 문자를 날렸다. 난 얼추 반은 정신이 나가 소리도 못 지르고 하얗게 질려 질질 끌려가다 정신줄을 놨던 모양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둘째 언니네 할머니 방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언니가 연지곤지를 찍고 그림처럼 앉아 있었고 동네방네 할머니란 할머니는 다 모여 수다판을 벌인 것 같았다. 쥐방울만 하더라도 사돈댁 처자는 처자인지라 형부네 식구들이 놀라서 난리를 부린 모양이었던지 나를 극진하게 대접을 했었던 것 같다. 그득하니 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뭘 먹으라고 내놓았었는데 고개만 팍 숙이고 있노라니 누군가 손수건에 주섬주섬 싸 주었던 것 같다. 둘째 언니는 좀 괄괄했던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니 살짝 내 허벅지를 꼬집었고 난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복주머니를 시부직이 내밀고 거즈 손수건에 싸준 몇 가지 사탕이며 떡을 들고 나왔었던 것 같다. 그날 난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오줌을 쌌던 날이기도 하고 이쁜 신부의 내리 깐 엄한 눈 속에서 메시지 읽는 법을 배운 날이기도 했다. 그 사건이 둘째 언니에 대한 기억의 시작이다. 둘째 언니는 희한한 음식들을 명절 때마다 고리짝에 해서 이고 왔었다. 그 음식들이라는 것이 입에서 살살 녹기도 했었지만 보기에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이쁘거나 푸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솜씨 좋은 언니가 내 언니라는 생각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언니들은 호적 상 언니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산 세월이 없으니 정도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둘째 언니네를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둘째 언니도 첫째 언니처럼 남 같은 사람이었다. 105살에 돌아가신 시할머니가 계셔서 그분 돌아가실 때까지 근 30년 넘게 일 년에 두어 번 가면 많이 가는 것이었고 난 특히나 아랫집 미친 사람 트라우마 때문에 얼씬도 못 했다. 둘째 언니는 우리 아홉 자매 중 유일하게 안면도 고향을 지키고 산다. 고집스러운 형부 때문이다. 엄마 돌아가시고는 엄마를 대신해서 내게 온갖 먹거리를 챙겨주고 친정 엄마 노릇을 해 주면서 언니와 형부는 나의 부모 대역이 되었고 나는 두 분의 동생이 되었다.

셋째, 넷째, 다섯째 언니들은 학교를 다니느라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다. 명절 때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언니들이고 이름 있는 날이면 선진 문물을 내가 사는 깡촌에 소개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학생이 아닌 직장 다니는 언니가 되면 옷도 사들고 왔던 기억이 난다. 특히 풍선껌을 한 통씩 주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늘 손님이었다. 언니들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와 띠 동갑인 막내가 태어났고 아버지가 갑자기 병을 얻으면서부터는 엄마는 오롯이 아버지 병구완에만 매달렸다. 나는 객지로 나간 언니들을 대신해서 막내를 돌봤던 것 같다. 집에서 내가 제일 컸고 세 살 터울, 여섯 살 터울 동생 둘이 더 있었다. 집이 커서 더 무서웠고, 집이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주변에 집이 없어서 더 무서웠다. 아버지가 손을 못 대고 급하게 돌아가시면서는 집은 그대로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안방에 다 모여서 잤는데 누군가 잠이 먼저 들면 윗목으로 굴려놓고 엄마 곁으로 어떻게 해서든 가서 자려고 매일 밤 자리 쟁탈전을 벌였다. 아주 치열하게. 잠덫 심하고 무섬증 많이 타는 나는 거의 매일 밤 잠을 설쳤고 그것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쪽잠쟁이다. 무조건 일곱째와 여덟째가 잠만 들면 살짝 굴려서 윗목에 밀어놓고 엄마 곁에 꼭 붙어서 잤다. 그렇게 3년을 버티면서 그 집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았다. 외지로 유학 가기였다. 한 번도 집 떠날 생각을 안 하던 내가 누군가 죽은 공간이라는 공포에 못 이겨 집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공간은 정말 공포의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3년 상을 모셨는데 아버지 영정 사진과 위패가 모셔진 상이 상여처럼 모셔진 안방은 그대로 공포의 안방 극장이었다. 견뎌내기 힘들었다. 나를 비롯해서 밑에 두 동생들은 모두 집이 무서워 대낮에도 집에 못 들어갔었는데 엄마는 그걸 모르셨단다. 그런 엄마라서 그런지 도회지로 나간 언니들 보러 엄마는 자주 집을 비웠고 한 번 객지를 둘러보러 나가면 사나흘은 걸렸었다. 엄마가 참 야속했었다. 그렇다고 윗동네에 사는 둘째 언니가 와서 뭐 어째 주지도 않았고 시어른이 계시니 언니도 움직이기 어려웠었던 것 같다. 어쩌면 둘생들이란 인식이 좀 모잤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이 산 세월이 없었으니. 우리는 지금도 시골집은 무서워 대낮에는 얼씬도 안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주검을 처음으로 본 공간이라서 그런 것인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한 공간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와 정을 뗀 공간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중학교 때까지 나를 비롯해서 동생들은 똘똘 뭉쳐서 보이지도 않는 귀신이니 뭐 그런 잡것들이 주는 듯한 공포에 맞서야 했다. 해가 떨어지면 엄마가 있든 없든 한 방에 모여 무서움을 잊기 위해 뭐라도 했다. 뜨개질도 하고 엄마가 까다가 밀쳐둔 땅콩도 까고 콩도 가리고. 그래도 밤이 길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셋은 지금도 뭉쳐 다닌다. 그냥 우리 세 자매만 엄마 자식인양 모이고 흩어진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좀 독특한 넷째 다섯째는 각자도생. 한 배에서 나왔는데 다 많이 다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내 또래만 해도 남자와 여자를 합해 기숙이 덕숙이 혜숙이 은희 무선이 광선이 은선이 그리고 나 여덟이나 되었다. 그러니 애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텔레비전이 유일하게 우리 집만 있었던 것 같다. 방에 애들이고 어른이고 그득해서 밤마다 욱쩍욱쩍했다. 배터리가 닳아서 텔레비전을 볼 수 없는 밤이면 애들은 애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끼리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도 많이 했던지 어떻게 갔는지 잤는지 모르게 날이 샜고 언제나 엄마가 모래가 한방이라며 이불을 막대기로 탈탈 털면서 하루가 시작되길 반복했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밤마다 모였다가 흩어지고는 했었다. 누구는 이미 선생이고, 누구는 이미 간호사고, 누구는 이미 회사 사장이고, 누구는 이미 군인이었었는데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말대로 된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말처럼 되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았다. 누군가가 그랬다.

'너도 참 신기하다'라고. 그렇게 말을 안 하던 애가 입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냐고. 아무튼 그 어릴 적 우리 집 아랫목에 앉아 있었던 아이들은 예상 밖의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아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으나 30년 만에 처음 만나던 그 순간 그곳에 모였던 친구들은 성공해 보이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의 성공 여부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던지 첫 만남 이후 초등학교 동창회에 모이는 부류들이 또 여러 부류로 갈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신산한 생각이 들었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제 생각대로 되나 싶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지지부진하게 사는 친구를 보면 왜 저러고 사나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들었었다. 사람 만나길 극도로 꺼리는 내 성격상 초등학교 모임은 단 한 번으로 그치고 말았으나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들었다.

촌놈이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인생이란 이미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프로그래밍해 놓은 것 아닐까란 생각도 해 봤고, 인간은 제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고, 내가 나가 된다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닐까란 생각도 해 봤고, 이 세상에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도 생각해 봤다.

어쨌든 나는 내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친구가 그랬다. 너는 원래 가진 게 많아 보였다고 자기보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너는 원래 나보다 가진 것이 많다'라고 생각되는 주변인들이 많기 때문이고 그 출발선이 달라서 내가 누군가보다 뒤처져 간다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나 된 것은 오롯이 내 책임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내 운명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것도 같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서 조금은 헐렁해져도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고 잘난 척하고 살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은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이 진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산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란 건방진 생각에 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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