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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고운 사람

by 이미숙

여름이 사나흘 안 본 장마철 오이처럼 자라는지 밤이 여우꼬리처럼 짧다. 퇴근해서 운동 조금 하고 핸드폰 조금 만지작거렸을 뿐인데 두어 번 숨을 몰아쉬면 다시 먼동이 트겠다.

오늘 퇴근할 때는 바람이 제법 불어주었다. 아직은 제 색을 입지 못한 단풍나무가 나붓나붓 흔들리며 진진초록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었고, 어른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수국도 송이째 흔들리며 나름의 후텁지근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꽃은 봄바람에게 주고 매실은 사람에게 다 털어주더니 홀가분했는가? 이미 늙은 매실 잎은 힘도 없어 보이고 잎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한가득이다. 이제 제 발치에 수북이 누울 일만 남아서일까? 여름을 절반도 건너지 못하고 힘이 빠진 모양새다. 빈 우렁이 껍데기와 흡사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방학이다.

숨이 고운 사람이 되어 아이들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한 학기였다. 무던히 숨을 고르고 단전에 힘을 주고 눈에서 힘을 풀고 혀에 차꼬를 채우려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두서없이 펄펄 뛰는 녀석들 앞에서는 숨을 고르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을 때가 많았고, 숨이 멎을 것 같아 과호흡을 할 때가 더 많았다.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혀는 내 의지대로 놀아주질 않았다.

글쎄?

공부는 차치하고라도 생활 공간 관히도 안 된다.

제일 장터에 내 놓은 물건들. 자슥들이 마구마구 깍아서 팔았다. 세상에 열 가지도 넘게 갖다 줬는데 만천 원 벌었단다. 환장헌다잉.

21세기에 내가 다닐 때 썼던 빗자루와 쓰레받기, 밀대를 손에 쥐어주고 청소를 시키라니 말이 안 될 법도 하다마는 어쨌든 모든 것들이 쉽지 않았다. 수북수북 쌓이는 쓰레기를 잔소리 안 하면 치우는 놈 한 명이 없다. 치우라고 해도 겨우 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딱 한 개만 치운다. 그것도 똥이라도 묻을 것처럼 가까스로 집어 들어 틱 던지면 그만이다. 다시 휴지통이 뱉어내도 제대로 집어넣는 녀석이 드물다. 욕을 달고 사는 놈들은 이제 지쳐서 간섭할 수도 없다. 사사건건 따지고 물고 늘어지는 녀석 앞에서는 기운이 달려 입을 다문다. 교무실 앞 쓰레기며 복도 청소는 내 차지된 지 오래다. 교실 청소도 물론 내 차지다.

안 가르쳐서 그렇단다.

딱 한 마디 해줬다.

"선생님은 집에서 청소 직접 하세요?"

로봇이나 기계가 대충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내가 그렇듯이.

아이들의 관심사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아닌데 자꾸 80년대 있을 법한 일들을 하라고 요청받는다. 오늘도 그 후텁지근한 날 장터를 열고 뒤처리는 죄다 내 몫이었다. 학생회 인솔해 그 넓은 공간 청소하는데 선생들은 얼씬도 안 했다. 지친다.

호흡이 고운 사람으로 살 수가 없다.

어른도 이제 자기 관심사 외에는 관심두기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런 곳에서 공공의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고 하루하루를 악전고투하는 일이다.


세상이 참 거칠게 돌아간다.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를 악전고투하며 살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그저 적당하게 하면 거친 숨이 좀 잦아들 것도 같은데 말이다.

암튼 어렵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은 거칠게 호흡하며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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