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하신다는 일
그분의 임재하심에 감사하노라.
그분이 하신다는 일이 나는 늘 불편하고 찜찜하고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급기야는 그분이라는 분과 단절을 했다.
50여 년의 인연을 끊은 셈이다
독하게 마음먹고 그분 집 문턱도 넘어서지 않겠다고 이를 앙다물었는데도 그 질긴 인연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세뇌되다 싶이한 원죄 의식과 허구한 날 들었던 그분의 진노하심에 대한 공포들을 쉽사리 끊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분 집을 한 주라도 거르면 당장 벌을 받을 것 같아서 그분 집에 가서 내내 졸아도 갔었다.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좋지 않은 일들은 모두 그분의 진노하심으로 해석되었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또한 나의 노력과는 무관한 그분의 은혜로 해석되면서 무서워서든 감사해서든 나의 모든 행위의 끝에는 그분 집에 계신 그분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분 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또 벗어났다 싶으면 소위 그분의 사역자들이나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 과도한 걱정과 과분한 관심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지옥에 떨어질 영혼의 소유자라는 낙인이 견디기 어려웠다. 죄지은 것 없이 죄지어 갑갑한 나날이었고 부자유스러운 주말이 연속이었다. 소위 주일 성수는 기본이었고 성가대 봉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주일학교 반사노릇과 식사 당번은 피해 갈 수 있었으나 그 또한 마음 편치 않았었다. 그래서 후딱 예배만 드리고 냅다 도망치는 것이었으나 그도 쉽지 않았다. 예배를 축도를 빛과 같은 속도로 끝낸 교회 관계자분들은 언제나 교회 출입문을 파수꾼처럼 지켜 서서 만면에 부처 같은 미소를 띠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고 내게 건네지는 말들은 "집사님 자주 뵙시다."였다. 내가 주일날 판 쥐구멍은 수를 헤아릴 수 없으리라.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식을 대로 식은 내가 듣는 설교도 말마다 비수가 되어 꽂혔다. 더 이상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전염병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나 또한 그 전염병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긴 인연을 코로나가 끊어냈다. 자연스럽게 그분 집에 가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조금은 죄의식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그분 집과 멀어지게 됐다. 지나고 보니 그 번거롭고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의식에서 벗어나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굳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그분의 계획하심과 이끄심에 맞추지 않아도, 굳이 그분의 진노하심과 기뻐하심에 내 영혼을 맡기지 않아도 나는 나답게 잘 살아졌으며,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늘 그러하듯이 굴러간다는 것을 내 선한 의지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벅찼었다. 억지로 나를 해석하려 하고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들에 내 생활을 맞추려다 보니 내 삶이 자꾸 추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국이 다 식을 때까지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했으며, 앉으나 서나 모든 것은 그분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언제나 굽어 살펴주시길 기원했으며, 벌레만도 못한 목숨을 구원해 주심에 감사했다. 넌덜머리가 나서 가끔씩은 "주님, 오늘의 기도는 1번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시니 모두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농담 삼아 주절주절 읊조리기도 했었다. 그런 날이 자꾸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코로나 19가 드디어 그 모진 인연을 끊어낸 것이다. 나도 인간인데 왜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불안도 견뎌내면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자꾸 그 불안을 들쑤셔 의식으로 소환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날엔가는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무심코 그 돌팍을 꼬나보고 다시 가던 길을 가다 보면 언제 그 돌팍에 무릎이 깨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굳이 그분을 소환해서 일주일의 내 삶을 샅샅이 풀어보고 다시 뭉치고 하는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날 위로하고 위무해 주었다. 교회 대신 주말 아침에는 논두렁 밭두렁에서 보낸다. 물론 소요음영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시골 살이가 녹녹지 않다. 주변에 일을 하시는 분들이 참 많을 뿐만 아니라 하늘님 눈치를 백 단으로 봐야 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 한량으로만 살 수가 없다. 대개는 땀을 한 말정도는 흘리면서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분 소유물이 아닌 그냥 자연 그대로의 나 말이다. 그래서 난 요즘 그분 집은 가급적 가까이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듯 내가 사는 모습 그대로가 나란 것을 인정하고 나니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허상을 붙잡고 살기에는 난 참 현실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말았다. 아주 먼 옛날 전깃불도 없던 섬에 그저 '불신 지옥' 신념 하나 가지고 들어왔던 불학무식한 전도사가 평생 떨쳐내기 어려운 종교적 신념을 심어놓은 것을 떼어내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몸에 맞지 않는 그분의 영적 양식을 먹느라 늘 소화불량에 걸렸었다. 각자가 편한 대로 그려만든 그분을 모신 집은 이제 내가 가까이할 수 없는 집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50년이 넘게 걸린 듯하다. 죄 지을까 봐 불신지옥 벌 받을까 봐 감히 손 끝으로나 혀 끝으로나 올릴 수 없었던 말이다.
내가 가장 고민스러웠던 것은 그분은 그분 집에 모셔진 그런 그분이 아니지 않을까란 의구심이었다. 늘 가난하고 겸손하지만 결단력 있고 혁명적인 그분이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회에 갇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분을 제 명대로도 살 수 없게 죽여버리지 않았던가? 도저히 살려두어서는 안 될 사람이 그분이었잖은가? 그분은 높고 높은 건물 속 주인도 그 누구의 숭배와 경배의 대상도 아니었지 않은가? 이 부분이 가장 걸리는 부분이었다. 건물 안에서 곱고 고운 찬미 소리를 들으며 맺힌 곳 없이 미끈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나 올리던 사람이 아니었지 않았나가 내 신앙의 고갱이었다. 거친 그분의 모습이 자꾸 미끈한 찬송가와 구슬픈 찬미 소리와 어긋나 늘 불편했었다. 높고 높은 건물 안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송조차도 그분의 진의와는 멀게만 느껴져 힘이 들었었다. 그분 집에서 걸어 나온 그분이 참 궁금하고 따르고 싶었었다. 죽음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그분이 참 존경스럽고 그런 그분을 따르고 싶었다. 어려웠다. 힘들었다. 할 수가 없었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읽으면 슬퍼진다. 그에 응수하는 답글들은 진이 빠지게 만든다. SNS에서 그런 글을 가끔씩 본다. 냉장고가 고장이 났었나 보다. 그걸 9개월 동안 참고 김치 냉장고로 대신하면서 사신 모양이다. 소위 '그분'이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하시는지 지켜보기로 하셨단다. 결국 '그분'은 당신들의 '아들'을 통해 역사를 하셨다고 한다. 9개월 만에 아들은 냉장고를 부모님 집에 사드린 모양이다. 이 런 글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한다. 첫째는 우리 집과 너무 흡사해서 그런 모양이다. 흡사 정도가 아니라 판박이라서다. 냉장고를 당장 사지 못할 형편일 수도 있다. 안 그렇겠나? 가난한 은퇴 목사였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알 것도 같다. 얼마나 불편했겠나! 신혼 때 냉장고가 없어 주어다가 쓰면서 겪었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세탁기조차 없어서 늘 손빨래를 해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불편함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딜만하니 견뎌졌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당신들의 선택이니 넉근히 버텼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들 입장은 어땠을까? 이 부분이 참 마음이 아프다. 아들이 형편이 됐었으면 아홉 달씩이나 부모님 냉장고 고장 난 것을 지켜만 봤을까? 그 아들은 늘 엄마를 생각했었단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당신들이 30대나 40대를 건너왔으니 그 나이에 얼마나 돈이 고단하고 헤픈지 아실 것이다. 얼마나 쥐어짰을까? 돈만 쥐어짰겠는가? 마음은 돈보다 더 쥐어짜지 않았을까? 한두 푼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가장 같으면 월급의 반쪽은 쥐어짜야 할 판에 마누라 보는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합리적인 내 생각이다. 내 40대까지는 몸보다 돈이 더 고단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마를 손에 받쳐 얹어놓고 생각해 봤다.
그분이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지켜봤다고 하셨는데 남의 집 냉장고 고장 난 것을 그분도 모르지 않았을까? 그럼 그 일을 아는 식구들 누군가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실까? 또 그분 친구들은 내가 알기로는 높거나 돈 많은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도록 놔두시지 그분이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와 미천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역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모르겠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 정도의 입지전적 인물이 되면 삼성가 며느리가 밀린 병원비정도는 대 줄 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 모래 한 알 정도도 안 되는 은퇴 목사님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분이 알 턱이 없다. 내가 아는 그분은 그렇다.
내 집 냉장고를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해결해 주리라 믿고 기다린다? 내 생각에는 높고 높은 전지전능한 이는 아닐 것이다. 그 사람들과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일을 아는 사람도,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도 그 문제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아픈 문장이었다. " 그분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굉장히 굳건한 믿음 위에 선 단단한 문장 같지만 나로서는 참 가슴이 아픈 문장이었다. 나도 여러 번 피하고 싶었으나 나 아니면 안 될 듯 해 일처리를 하고는 쪼달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돈독한 쪽은 그분의 선하신 은혜가 세계 만방까지 뻗쳤겠지만 나로서는 참 고단하고 신산한 말이었다.
그러나 알았으면 좋겠다.
그분의 은혜로만 치기에는 과부의 엽전 한 닙의 헌물이 얼마나 피땀 어린 염보돈인지! 그들에게 베푸는 그분의 은혜는 오히려 염보돈 없는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도 이제 돈 한두 푼에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형편은 지난 것 같다. 달리 말하면 한 푼이 아쉬운 나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갓 직장을 잡거나 갓 결혼한 아들 딸 손에서 가까스로 어렵게 풀려나오는 선물 따위를 효도나 그 밖의 어휘들로 포장해서 넙죽넙죽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말이다. 굳이 필요도 소용도 없는 것들에 에너지를 쓸 수도 있는 꼰대 나이가 됐다는 뜻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게 직접 이러저러한 것들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비춘다. 마음이 동했다가도 내 성질머리라는 놈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팩 돌아버린다. 사고 싶으면 내 능력껏 사면되고 능력 안 되면 안 사면 된다. 먹고 싶으면 내 돈 주고 먹으면 되고 능력이 안 되면 안 먹으면 된다. 그걸 굳이 그분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고 은혜로 포장까지 할 것까지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나이다. 깨어 있지 않으면 나도 언제 어느 때 그런 사람으로 우뚝 설 지도 모른다.
요즘 주말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비로소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