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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단상

몹쓸 짓 혹은 남는 장사

by 이미숙

92년 2월 29일에 결혼을 했으니 2024년 올해로 결혼 32년 차다. 아이들은 벌써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독립한 지 오래다. 아이들이 도무지 결혼이나 2세 계획이 없다는 것이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나름 자신들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짚신도 짝이 있으니 언제든 좋은 인연 만나면 가겠지.' 싶어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또 아이들에게 굳이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내가 밟고 선 땅이 정말 결혼과 그에 따르는 출산이며 육아를 축복하고 장려해도 되는 곳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참 많이 힘들었다. 시쳇말로 내가 결혼해서 살면서 들인 공의 10할만 혼자 살면서 들였더라면 이렇게 고단하고 신산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심정에 아이들에게 굳이 결혼해서 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랬다. 26년과 27년을 각자의 삶을 살다가 만난 두 남녀가 합을 맞춰 살기도 버겁고 어려운데 그 주변에 널려있는 생경한 관계들과 합을 맞추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 주변의 관계들이 억지로, 간신이 맞춘 부부의 합마저 깨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했다. 신혼여행이 끝나는 날부터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남편이라는 사람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부엌이 집이 통째로 넘어왔다. 밥이며 빨래며 청소 등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맡겨지는 것들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날이 연속되면서 정신이 피폐해졌고, 정신이 피폐해지면서 내 삶이라는 것이 거덜 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신혼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그냥 전쟁이었다. 우리 싸움에 시부모가 가담하고 시부모 싸움에 우리가 가담하는 셈이었다. 우리가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고 시부모가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늘 내 입장에서는 못난 남편이 원인이었고, 시댁이 문제였다. 그렇게 시댁에 얹혀 8개월을 살았다. 나는 삼 개월이 못되어 10킬로그램이나 빠졌고, 남편은 해골 그 자체로 변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 나이가 47세, 시아버지 연세는 연세랄 것도 없는 53세였다. 두 팀 다 철부지였던 것 같다. 누구누구를 봐주거나 품어줄 수 없었던 설익은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치열하게 싸움박질만 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잘해 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밥하고 빨리하고 청소하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하루하루를 굴리고 또 굴리다 보니 삭는 것은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삭아 문드러지고 몸도 삭아 문드러졌다. 8개월 동안 나는 몇 번의 유서를 쓰고 마음으로는 수십 번도 더 가출했으며 이혼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도 생기고, 시어머니는 겪지 않았다는 유산의 위험으로 자리보전을 하는 날조차도 나는 고운 며느리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대로 몰골이 상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몰골이 상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남편 직장 근처로 500만 원에 10만 원 하는 방을 얻어 분가했다. 큰애가 뱃속에 8개ᅌ궐째 되던 달이었다.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댁도 경기도로 이사를 갔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제 모든 고생이 끝나고 모든 고민이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우선 아이 출산 후 몇 달이 되지 않아 시동생이 우리 집에서 군 임무를 시작했다. 내 동의란 있을 수 없었다. 그냥 ‘방 둘이니 너희가 데리고 있어라. 몇 달 안 되니 내가 양식은 대주마.’가 다였다. 개뿔 쌀 한 톨도 못 받아봤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오셔서 며칠씩 묵어가시는 것도 어려웠다. 아들이 내 눈치를 보며 연락 좀 하고 오시라고 하면, '내 아들 집에 오는데 연락을 하고 오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우리는 또 싸우기 시작했다. 개똥도 없는 살림에 이런저런 시댁과 관련된 행사를 치르고 나도 우리는 여지없이 싸웠다. 싸우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때는. 이름 있는 날 뒤에 남는 것은 피로와 빚이었다. 그렇다고 보람이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시댁을 가면 가방도 풀지 못하고 부엌에서 일부터 했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크면서는 그런 나를 엄호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휴일을 일만 한다고 타박을 하기 시작했고, 할머니 자식들은 뭐 하고 엄마만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크면서는 나의 그 보람 없는 일들이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때가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하는 시집을 왜 왔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남편은 원래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보다는 인간 친화적인 내가 들어오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싸움 끝에 언젠가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등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떻게 갈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새로운 사람이 합류하면 갈등이 해결되는가? 또 다른 새로운 갈등이 생기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26세 신랑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고 싸웠다. 남편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의 싸움의 전리품은 언제나 ‘심리적인 별거와 이혼’이었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나는 반드시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졸혼을 할 거야.’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졸혼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내 주변 누구라도 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3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해서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고 허구한 날 이전투구를 했을까? 생각해 보면 헐뜯고 욕 먹이기에는 너무 아깝고 결 고운 남편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그다지도 괴롭혔을까? 뭐가 그렇게 분할까를 생각해 봤다. 우선은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남편이라는 존재 하나로 사돈의 팔촌까지 엮인다는 것이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일들을 챙기는 것이 참 억울했고 싫었다. 나와 관계된 친척은 결혼과 동시에 싹 지워졌다. 심지어는 자매들에게 일이 생겨도 눈치를 봐 가면서 오갔다. 결혼식이며 장례식이며 그것도 모자라서 명절날이면 친정도 못 가는 주제에 여기저기 마음 불편한 상태에서 싫든 좋든 들락거리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는 것, 잘하든 못하든 내가 누군가의 평가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시댁 친척들 대소사를 챙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면서 우리 친정집 대소사는 시댁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좀 억울했다. 남편과 아이들만 챙기고 싶었다. 그런데 내 역할은 거기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과 남편 밥과 옷을 챙겨 먹이고 입히고 아이들 등교시키면서 출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지는 생활 중간중간에 시댁에 일이 생기거나 이름 있는 날은 또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힘이 들기도 했지만 반복될수록 짜증이 났다. 그러다가 친정어머니가 쓰러지시고 병원에 식물인간 상태로 8개월을 누워 계시는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시댁에서는 그 누구도 찾는 이가 없었고, 남편도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을 때 한 번, 명절에 한 번, 장례식 때 한 번으로 끝이 났다. 참 아이러니했다. 대의명분을 그리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인들 일이 생기면 안수다 병문안이다 그리도 살갑게 챙기시는 집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차근차근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장인이 일찍 돌아가셨으니 장인을 챙길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장인 기일을 챙기는 법도 없고, 아예 장인 기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속 썩이는 처남도 없으니 맘고생을 해 본 적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신 불편하게 하는 처제나 처형이 있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집 대소사에 당신을 오라 가라 하는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출산을 하거나 육아를 하거나 출근을 할 때, 시댁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내 생일도 아이들 생일도 시댁은 모르고,

그렇다고 아이들 대소사를 챙기는 법도 없고.

이제 나도 당신과 아이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제 당신 어머니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들이 챙겼으면 좋겠다. 30년 넘게 그 누구도 오지 않는 명절이며 기타 대소사를 나 혼자 챙겼으면 이제 됐다.

이제는 당신과 당신 형제들이 챙겼으면 좋겠다.”

남편도 ‘그러마’ 했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몇십 년을 종처럼 매일 수는 없잖은가 싶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안 하거나 안 가는 일이 참 힘들었다.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이름 있을 때만 가던 일들인데 그것조차 안 하려니 참 면이 서질 않았다.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뻔뻔하게 견디는 중이다. 더는 힘이 들어서 못 하겠다. 언젠가 시부께서 나를 넌지시 떠보았다. 당신이 치매에 걸리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속으로는 천불이 났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약 드시고 치료하면 되시겠네요.’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지만 불편한 마음을 장전해서 남편에게 쐈다. 그러시더라고.

가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일방적인 희생과 봉사만을 요구하는 강압적인 제도적 가족이 내게는 참 불편하다. 어릴 때는 매스컴에서 보는 화기애애한 단란한 시댁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불편해 보인다. 나보고 그렇게 살라 하면 손사래를 칠 것 같다. 어쩌면 그만큼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생겨서거나 시댁과의 골이 깊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시댁 어르신들은 연세를 드실 만큼 드셨다. 우리 속담에 ‘이빨 빠진 호랑이’ 정도는 되실 것 같다. 그렇게 새 식구에게 날을 세우던 분들이 이제 누구보다도 고분고분해지셨고, 너그러워지셨다. 나는 가끔씩 옹졸해진다. 더 잘해드리고 살펴드리고 싶으나 ‘부모 봉양’이라는 짐이 통째로 내게 넘어올 것 같아(아니 틀림없이 넘어올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의 추이로 본다면 그렇다)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마음을 접곤 한다. 나도 인간인데 왜 측은지심이야 없겠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결혼이라는 제도가, 시댁이라는 제도가, 며느리라는 이름이 날 너무나 옹졸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손해 보고 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짐을 지면 그 짐에 짐을 더 얹어주는 것이 결혼이고, 시집이고, 며느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시집에서 며느리에서 결혼에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결혼하라고 아이를 낳으라고 닦달할 수 있겠는가!

결혼은 지금의 결과(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리 잡고 잘 살아가고, 시댁과도 어지간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있는)만 놓고 보면 ‘남는 장사’다. 그러나 그 과정을 풀어헤쳐 놓는다면 분명 ‘몹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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