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서 스치듯 자주 읽는 어르신의 글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가신 분의 사연을 읽었다. 살아서 자신의 장례식장에 올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문구를 골라 적고 또 본인의 응원 문구를 앞 뒤로 적은 봉지에 정성 들여 구운 죽염을 귀하게 구해 담아 일일이 빈소를 찾는 이들의 손에 들려 보내며 결코 슬퍼하지 말길 당부했다는 글이었다. 사는 동안 마지막을 세상에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마음을 포개고 포개며 보냈을 얼굴도 모르는 어느 노익장의 고결한 숨결을 이 지루한 여름 끝에서 만나는 듯하여 숙연해졌다.
친정어머니가 아침밥을 드시다가 갑자기 밥풀이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 길로 의식을 찾지 못 하고 병원에서 8개월을 누워 계실 때 죽임이 이리도 처절해서야 어디 함부로 죽겠는가 싶었다. 평생을 불꽃같이 산들 마지막이 저리도 애자지게 서럽고 슬퍼서야 어디 머리라도 풀고 저승길 가겠는가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저승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말도 못하고 목청 돋워 시원하게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남의 손에 이리 굴려지고 저리 굴려지면서 치욕스럽게 연명해 가며 뿜어내는 환자들의 그 구리디 구린 냄새 속에서 그다지도 외롭게 죽는 대서야 감히 어찌 죽음을 넘보겠는가 싶었다.
요즘 병원들이 가망도 없는 환자들을 상대로 시체 장사를 한다는 생각을 갈 때마다 했었다. 쓰러지신 1월 4일부터 돌아가신 8월 13일까지 엄마는 변함없이 죽음 그 자체였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환자 코와 뚫린 목구멍 목줄을 통해 살았으나 살지 못하는 엄마가 그렇게 냉랭하게 누워있다가 당신의 몸에 있던 자양분이 다 하는 날에 돌아가셨다.
그 누구도 엄마를 위해 콧줄과 목줄을 뽑아달라 못 했다. 그래도 속사정 많이 들어준 내가 발 벗고 나섰었다. 연명 치료 그만하라고.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윤리 위원회라는 것이 열리긴 열렸는데 의사들만 연명 치료 종료를 거부했다.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으리라. 살아날 가망이 없는 82세 노인이었음을. 그렇게 우리 엄마는 죽는 날까지 기계에 의존해 살은 듯 죽은 모습으로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살아생전 일제 강점기에, 6. 25에 험난한 질곡의 순간들을 건너오느라 휴지 한 장을 마음대로 못 쓰셨다. 얼마나 주모가 된 지 오줌 누고 휴지 두 칸, 똥 누고는 다섯 칸에 물을 바가지로 떠서 뒷물을 했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흔전 만전 쓰면 못 쓴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다. 그렇게 주모를 피며 모은 돈을 병원은 알 짜리 없이 한 달에 3, 400씩을 뽑아갔다. 평생 허리가 휘도록 번 돈을 말년에 병원 다 퍼 주고 가는 셈이었다. 우리 엄마 사태에 직면했을 때는 이런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영양제 넣으라면 넣고 알지도 못하는 약물을 쓴다면 썼고 욕창에 좋은 침대를 쓰라면 썼었다.
그러다가 아랫집 아주머니가 80세가 넘으셨다는데 올 설 전에 갑자기 쓰러지셨다. 얼마나 점잖고 고우셨는지 시골 주말 농장 하면서 이것저것 챙김도 받고 챙겨드리면서 친구가 됐었다. 늘 "왔능교?"를 차분하고 낮게 한 마디 하시면 그게 다였다. 젊어서 고생을 무지한 노인이라는데 얼마나 고왔는지 그런 티가 없었다. 쓰러지시고 나니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가 곁에 있으니 할머니 소식을 싶어 발걸음을 하셨다가는 넋두리처럼 아랫집 아주머니 넋두리를 대신 풀어놓고 가시고는 하셨다.
며칠 전 아들 되는 사람이 부인과 함께 와서 할머니가 농사를 지시던 채전을 검은 비닐로 꽁꽁 싸매두고 가는 것을 봤다. 나도 남편도 땅을 그렇게 꽁꽁 싸매 두는 것이 낯설어 한참을 쳐다봤다. 아주머니가 아신다면 어쩔까 싶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는 답변이었고 이제 다 된 것 같다고도 했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아주머니도 평소 엄마처럼 건강하셨으니 당신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려면 최소 여덟 달 정도는 되어야 하는가 보다고. 정말 길어야 한두 달이면 이제 또 한 사람이 한 많은 세상을 등지겠다 싶었다. 목이 안 돼 갈빗대 아래를 뚫어 영양을 공급한다고 했다. 환자는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나 싶었다. 그 아주머니도 살만 하니 쓰러졌다며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찼고, 너무 일만 하면 제 명대로 못 살다가 죽는다는 것도 아는데 눈에 뵈는 일을 안 할 수도 없다며 넋두리를 하시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이 지금 동네로 들오와 품팔이로 연명하기도 했고 이 집 저 집에서 몇 되박씩 주는 양식으로 간신히 연명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했다. 이제 자식들 번듯하게 살고 밭이며 돈이며 장만도 해 걱정 없이 살만 하니 쓰러져 평생 긁어모은 재산을 죽을 자리에 다 깔아버린다고 혀를 찼다. 남의 일이 아닌 듯 다들 남 좋은 일만 시키다가 갈까 봐 걱정하는 눈치다.
내 세대와는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치기에는 너무 처절한 현실이다. 준비 없이 와서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 못 차리고 그냥 죽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 나이도 적지 않은 나이라는 의미다. 우리 아버지는 내 나이에 세상을 황망하게 등졌고 엄마는 나보다 딱 22년 더 사시다 황망히 가셨다.
한 서너 달 만에 병에 져 급하게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의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엄마의 죽음은 더 충격적이었다. 사람이 먹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고 언제부턴가 사례를 들리거나 기도로 뭔가 들어가 불편해지면 그 불편한 마음에 엄마가 포개진다.
20대에 신체 모든 장기를 기증하는 각서를 작성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연명 치료 거부 각서를 울산대 병원에 등록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태는 막고 싶었다. 가급적이면 두 주먹 불끈 쥐고 멋도 모르고 이 세상에 나와서 철퍼덕거리면서 살았을지라도 가는 것만큼은 존엄하게 가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그런 나에게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 점에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응원하면서 가셨다는 분의 소식은 참 본받고 싶었다.
이제 죽음에 나의 삶을 포개는 작업을 해야 할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요 며칠 아무렇게나 먹고 자고 아이들이 엄한 짓을 벌인 일을 처리한다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하루 종일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학교에서 김밥으로 우걱우걱 대신했더니 뱃속에서 천둥번개가 일어난다. 아직도 불편해 잠을 설쳤다. 잘 죽으려면 신선하고 깨끗하고 맑은 에너지를 가진 음식을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하루하루의 마음을 잘 포개 접어야 끝마무리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