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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애증이 교차하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

by 이미숙

40 넘어 결혼하는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더러는 갈까 말까로 고민하는 주변인들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자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왠지 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솔직한 마음은 나마저도 안 가면 그녀가 더 주눅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후 5시!

시간 내기 쉽지 않은 시간 대였다. 늘 내일 일이 돌덩이처럼 짓누르는 직업인지라 놀아도 시원찮고 뭘 해도 내일일이 강박으로 자리하다 보니 일요일 저녁때 시간 내서 남의 경조사에 참석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래도 가야 하겠기에 기차를 주섬주섬 챙겨 탔다. 웬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대전 가는 기차는 입석까지 만석이었다. 안면 몰수하고 그냥 올라탈까 했다. 역무원이 딱해 보였는지 내가 착해 보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좀 덜 떨어져 보였는지 마이크에 대고

"대전 가는 손님! 표 구하셨어요?"

그런다.

"아니요!"

고맙게도 입석표 한 장을 끊어 준다. 기차를 타러 가면서 그래도 내가 착하게 사나 보다고 생각도 했지만 기차에 올라와 입석 좌석에 앉고서, 개찰구 앞과 무인 발매기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당황스러워하는 내가 아마도 늙수그레해 보여서 안타까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공공장소에 가면 종종 그 못된 기계들 앞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떻게 할 수 없어 둠짓거리고 당황스러워하는 나이 든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이 앞에 장사는 없을까 싶어 좀 가슴이 허했다.

더위가 살가죽을 벗겨낼 듯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야외 결혼식이었다. 손님들이라고는 지인 및 가족들 뿐인지 야외 결혼식장의 그 장엄하고 드러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그 멋짐과 비교되어 나조차도 머리를 흔들게 만들었다. 신부는 어디 눈 둘 곳 없이 파인 드레스에 자세히 보면 결혼식이라는 것은 대충 통과 의례 정도로만 치르고 싶었을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한 드레스였다. 나도 모르게 드레스 앞섶을 끌어올려줄 뻔했다. 젊으나 늙으나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드러내서 추해 보이면 좀 자제도 해 볼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누가 봐도 곁을 피하고 싶은 그녀의 엄마! 오랜 세월 투석으로 인해 피부조차 얼룩덜룩한 그녀는 이온음료를 곁에 끼고 보름달처럼 부풀린 한복이 거추장스러워 연신 걷어 올리고는 했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왜 저렇게 몸에도 맞지 않는 12폭 치마를 예식복이라고 굳이 입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좀 자기에게 맞는 간단한 복장을 하면 안 되나도 싶었다. 예복이 예복이 아니다. 확 벗겨내고 간단하고 이쁜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도대체 머리에 맞지도 않는 꽃단장은 왜 하고 난리며 연예인도 아닌데 몇 센티는 될 정도의 화장은 왜 하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누구보고 보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참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어쨌든 그녀의 엄마는 그 거추장스러운 한복이 최대의 난관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녀의 곁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왜 그 코딱지 만한 핸드백은 왜 들고 거추장스러워하는지도 모르겠었다. 다들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모습들이었다. 드레스든 뭐든 자기 몸에 맞아야 보는 이도 편할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보는 내가 다 위태위태해 보였다. 신부는 신부 대로 그녀의 엄마는 엄마대로. 나도 그녀의 엄마를 본체만 체 하고 싶었다. 그녀의 엄마에게 신경을 써야만 할 사람들조차도 그녀의 엄마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인 듯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엄마는 외딴섬이었다. 애써 지우고 싶은 그들의 그림자인 듯했다. 오지랖 넓은 내가 음료병을 달라했다. 분명 내가 음료병을 달라하면서 보기에 좀 그렇다고 했는데 잠시 눈 돌린 사이에 어느새 또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다시 빼앗았다. 좀 참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들 입장할 때도 끼고 갈 기세였다. 여차저차 식은 번갯불에 콩 튀기듯 끝났다. 그 짧은 시간에 내 눈은 그녀의 엄마에게만 고정됐다. 그때 알았다. 그녀는 환자였다. 끝나기가 무섭게 음료수를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 벌컥 들이키다 앞자락에 쏟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저걸 어쩌나 싶었다. 좀 살갑게 챙김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싶어서 처음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그냥 오려다가 너무 더워서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했다. 더우니 식당에 다 들어앉아 있었는가 봤다. 한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내게 먼 데서 와 주어 고맙다고 했다. 좋은 덕담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대는 오늘 걸어 다니는 꽃이었어."

"꽃은 뭘!"

웃긴 모양이었었다. 신부는 다 꽃이라고 해 주어도 그녀의 얼굴은 신통하지 않았다. 많이 먹고 가라며 자리를 이내 떴다. 주문을 왕창 그녀의 뒤꼭지에 대고 걸었다. '행복하라, 즐겨라, 잘 살아라.'라고.

나오면서 보니 그녀의 엄마가 반찬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왜 저러지 싶어 자세히 관찰했다. 누군가 신부 엄마라고 예의 주시도 할 것 같아서 그녀 곁에 찰싹 달라붙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음 차례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생이 몸도 안 좋다며 그렇게 자극적인 걸 먹어도 되냐고 거들었으나 그녀는 눈치를 못 챈 듯했다.

잠시 언니네 들러 차 한 잔 마시면서 그녀의 엄마가 아마도 경계를 밟고 있는 사람인 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어쩌면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이 눈이 어둡든지 마음이 어둡든지 해서 발견이 되지 않는 세상살이에 장애를 겪는 사람 중 1인인 것 같다는 내 생각을 말했다. 타박하고 눈치 주고 할 사람이 아니라 곁에서 살갑게 챙겨줘야 할 사람인데 그러기에는 주변인들이 그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살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그녀의 엄마에게 질리고 질려 분노와 짜증으로 인해 봐야 할 것들을 못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까이에 살고 있는 언니는 열통 터지고 화가 치밀어 올라 같이 30분도 못 있는다고 했다. 가급적이면 안 보고 사는 것이 이도 저도 속 편하다고 했다. 한 다리 건너인 내가 뭘 안다고 그녀에 대해 왈가불가 말을 하겠는가 싶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는 내내 먹먹했고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그녀의 가족 관계가 그녀를 얼마나 미치게 만들까를 생각하니 옥이야 금이야 키워내고 지금도 그녀의 눈곱조차도 금메달이니 은메달이니 훑고 빠는 우리 딸과 비교되어 참 먹먹했다. 그녀도 사랑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 늘 고민스러워하고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엄마가 저질이 해 놓은 것을 금전이든 뭐든 처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 아주 가끔 내게 퍼붓기도 했었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냥 나는 언제나 그녀의 쓰레기통처럼 받았었다. 뭐 어쩌겠는가! 그래서 난 또 그녀가 무서웠다. 잘 받아주면 도를 넘어 너무 엉기고 그러다 보면 내 감정 수준을 넘어 치고 들어오니 감당하는 것이 어려웠다. 솔직하게 잘해 주면 너무 엎어져 앞뒤 분간을 못 하는 부류가 이제 무섭다. 말로만 책임지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고 그렇다고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 주기에는 내 깜냥이 안 되는 너무 젊은 나이이다. 나라는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밤늦게 그녀에게 톡이 왔다. 도대체 엄마라는 사람을 어쩌면 좋겠냐는 하소연이었다. 안 봐도 그림이다. 아마 엄마라는 사람과 티격태격하다가 활활 타는 가슴의 불도 진화하지 않은 채 내게 톡을 한 모양새였다. 그 불을 내 에게 톡을 하면서 진화할 것인지 어쩐 지는 모르겠으나 밤 11시가 넘어 톡을 몇 년 만에 그것도 자기에게 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는 사람에게 톡을 했을 때는 말이 필요 없이 무례한 것이라는 것을 그녀도 모르는 듯했다.

나도 무 자르듯 싹둑 자르고 싶어서 처음에는 뜨악한 몇 글자로 대신했으나 그녀의 가슴에서 활활 타는 불 정도는 꺼지는 시간을 주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둠칫둠칫 추임새 정도만 반응했다.

엄마라는 사람이 창피해 죽겠단다. 인연을 끊고 싶지만 또 불쌍하단다. 그 문장을 콱 물고 쓴 물을 한 바가지 끼얹고 싶었으나 참았다. 나이 40이 넘은 딸이 엄마 창피하다는 소리를 한다면 그녀도 엄마와 별반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선잠을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그녀와 나눈 톡을 제일 먼저 봤다. 그녀야 말로 가장 위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구절절 톡을 보냈다. 엄마와 그녀는 별개의 인생이고 엄마는 엄마 그녀는 그녀라는 말이 골자였던 것 같다. 객쩍은 소리라는 것을 안다. 엄마와 딸이 어떻게 분리가 되나?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철륜을 무슨 수로 끊겠는가? 그것도 온전한 사람도 아니고 팔푼이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존재가 가족이라면 무슨 수로 그 고래 힘줄보다 질긴 그 끈을 어떻게 끊겠느냐 말이다.

가족과 연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온전한 사람들 얘기라는 것을 나이가 먹고 나서야 알았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애초에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 부적합한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이면 그것은 빼도 박도 못 한다. 그들은 죽어서도 끊기지 않는다. 아주 고약한 관계이다 보니 죽음으로 싸움이 끝나더라도 골 깊은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죽어 썩어 문드러져야 그 흉터도 사라진다. 내 깡촌 출신이다 보니 그 아둔한 세월을 건어 오느라 가족들에게 입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이 대명천지에 그런 일들이 가당한가를 수없이 질문해 보아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 말이다. 엄마를 하도 패다 보니 밑이 빠져 죽을 뻔한 가정 폭력이 만연한 공간에서 큰 내 친구는 가족이 무서워 가족을 안 만들었다고 했다. 미술 교사인 친구는 지금도 홀로 산다. 그녀가 가족을 안 만들었다고 해서 홀가분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지금껏 가끔씩 수면제를 먹고 잔다고 했다.

이 숙제를 가진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이제 겁이 난다. 말을 건다는 것은 너도 일정 부분 책임을 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리 만치 이들과 가까이하고 살기가 힘들다. 내 삶도 녹녹지 않건만 만나는 횟수나 말하는 횟수에 비례해 부담도 늘어난다. 난 그것이 무서운 소시민이다.

해답이 없다. 인생이 그러한가도 생각해 봤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도의 문제인가도 생각해 본다. 그럴 수도 있지 싶다. 화통할 수 없는 쪼잔한 인생길을 걷는 내가 이래저래 도움을 줄 수 없음이 참 답답하지만 솔직하게 이러저러한 일이 발 담그기가 무섭다는 표현이 적확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인생이 이다지도 쪼잔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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