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채전밭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

by 이미숙

각종 채소를 심었다. 무, 배추, 케일, 상추, 쑥갓, 쪽파, 당근, 대파 등등.

다 못 먹는다. 벌써 천경채와 상추는 두둑 높이보다 높게 자랐다. 이것저것 심고 가꾸면서 여기저기 나눔도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받는 사람은 별스럽지 않은데 하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경을 치는 노릇이다. 올해 봄에 심은 애호박은 지치지도 않는지 세 계절을 견디며 무수한 열매를 내놓았다. 여기저기 많이 나눔도 그 덕에 했지만 이것도 일이다. 더욱이 밥을 예전처럼 그득그득 먹거나 하는 일이 드문 요즘 나누는 것도 때로는 눈치가 보인다.

사람이 좋아 나눔을 하지는 않는다. 나도 좋은 이웃 축에는 못 드는 사람이다. 이웃에게는 좀 무신경한 사람이다. 굳이 찾아가 말을 붙이는 일도 없고 매우 친절하게 인사하는 폼으로 보면 지극히 상냥해 보이지만 막상 곁에 가면 개과라기보다는 고양잇과에 가까워서 곁을 주는 법도 드물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어려워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니 혼자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음지형 인간인 셈이다.

그래도 허세는 있어 호기롭게 이것저것 가져가라는 말은 잘한다. 손도 커서 한 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위인이다. 나눌 것이 너무 빈약해서 한때는 뜨개질도 배우고 꽃차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했으나 어니까지나 본성에 맞지 않는 일들이다 보니 중간에 멍석 말듯 말아 구석에 처박힌 것들이 많다. 근 10년을 꾸준히 하고 있는 일이 텃밭 농사다. 얼마 전에는 땅도 조금 샀다.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다. 농사라는 것이 물리는 법이 없다. 때가 되면 되어야 할 것들이 어김없이 되고, 와야 할 것들이 오는 그 꾸준함이 좋다. 기호가 변덕스러운 나를 돌아보는 좋은 지기이다.

올해도 느른하기는 하지만 꾸준하게 세 계절을 흙을 만지면서 주말을 보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없다. 특히 올해는 매실청이나 고추 장아찌 등 흔하디 흔한 것조차 애써 넘겼다. 한다고 애쓰고 버린다고 애쓴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제 가급적이면 저장 식품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신선할 때 따서 여기저기 나눴다. 생색 내기 싫으니 새벽에 몰래 자주 다니는 곳에 두기도 하고 직장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랬더니 얼추 소비가 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작년 추수 때 찹쌀 20킬로 멥쌀 20킬로를 사서 지금까지 먹고 있다. 그 새 떡을 서너 번에 걸쳐 서너 되씩 했으니 거의 밥을 안 먹고살았나 싶을 정도의 쌀 소비량이다. 그것도 이웃이 농사를 지어 방아를 찧었다기에 예의상 사 둔 쌀들이었다. 우리 엄마가 햅쌀 나올 때 하시던 말씀 그대로 "지질 멀자 나도록" 묵은쌀을 먹은 샘이다. 이제 찹쌀 반 됫박 정도 남은 듯하다. 당장 내일모레부터 명절 손님들이 들이닥친다는데 쌀부터 사야 할 판이다.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아직은 추수를 이웃이 하지 않은 모양이다. 추석에 냉큼 먹을 한 5킬로그램 정도만 사야 할 듯하다. 때 되면 맞춰 뭔가를 사야 할 의무가 또 생겼다. 안 사면 된다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다.

가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버릇 중 하나가 '내가 아는 사람 중 아무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도 스스로 놀라 방금 내가 입에 올린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인가 생각해 볼 때가 종종 있다. 내 삶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름만 알거나 대개 사회적인 명성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암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떨 때는 스스로 낯부끄러울 때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는지 별것을 다 목록으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이랬다. 자기가 농사를 지어 나누는 사람도 아니고 나 대신 밥값을 대신 내주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슬플 때 같이 울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세상을 슬기롭게 사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남을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 사람.

한 마디로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다.

채전밭을 닮아 소박하지만 계절을 어기는 법 없이 늘 그러한 사람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