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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본 저승이 좋단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 않는가!

by 이미숙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낮은 무덥다.

햇빛이 가던 길 멈추고 잠시 감잎에 앉아 숨 고르기를 하는지 감이 발그레하다. 햇빛도 감처럼 달달할까?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한 움큼 베어 물으니 방금 깎은 풀 냄새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다. 풋풋한 듯, 소여물 냄새인 듯. 세상 만물은 맛도 향도 없는 햇빛을 받아 각자의 냄새와 향기와 맛을 수태하는 모양이다. 감나무 아래 푸덕푸덕 드러누운 감이 제법이다. 햇빛에 곪아 진물이 흐르며 냄새가 진동한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곪으면 본래의 향이 퇴색해 버리는 것인가! 밟혀 배가 터지기 전에, 내년에는 다시 참새 혀 같은 잎으로 시작하여, 종소리 나는 꽃으로, 다시 맑알간 열매로 오시길 주문하며 감나무 발치에 던져둔다. 그러길 4년째인데 감나무는 어김없이 그 모습 그대로 오고 가고 있다. 감은 감으로 다시 온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혹자는 작년 감이 올해 감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심오한 철학은 잘 모른다. 내겐 그저 감일 뿐이다. 감을 해마다 맞고 보낸다.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아는 한 죽어서 가장 많은 변화와 변용을 거친 인물이 ‘예수’가 아닐까 싶다. 우선 사람의 아들이 ‘신의 아들’이 된 사람 중 한 명이 예수이다. 당대에는 가장 악명이 높았던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의 이슬로 사라진 존재도 예수다. 그런데 죽음이 삶을 이긴 자이면서 형장의 이슬로 단박에 사라지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면서, 살아서는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죽음의 꽃이고 죽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천국의 주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느낌으로는, 예수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죽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죽기 전에 한,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기도문에는 그 절박함이 묻어 있다. 그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과업과 신의 아들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민 등보다 나는 최소한 그의 마지막 단말마에서 고통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적 고뇌를 느꼈다. 십자가형이 어떤 형벌이던가? 내가 조사한 바로는 ‘최대한 죽지 않게 인간의 정신적 한계를 체감시키고 목숨을 끊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다. 사형의 역사를 모두 다 뒤져도 십자가형에 비견할 만한 법적 형벌은 없다고 한다. 죽음의 모든 차원을 경험한 후에야 죽는다는 십자가에서 예수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면서 죽었을까?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설렜겠는가? 곧 천부를 만난다는 기쁨이 십자가에서 받는 치욕과 모멸과 고통을 너끈하게 상쇄시켰을까? 죽음은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이제 알 나이이다. 그는 그냥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그의 마지막 말은 공식적으로는 “다 이루었도다.”였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의 삶의 끝이요, 완성은 ‘죽음’이었지 않았을까? 그 과정은 실로 대단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가 위대한 것이지 않을까? ‘끝’은 ‘완성’일까? 뭇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는 죽으면서 ‘천국’을 완성하였고, 그것을 일컬어 ‘이루었다’라고 했을까? ‘이루다’에는 ‘뜻한 대로 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 ‘뜻’이 ‘천국 건설’ 내지는 ‘완성’일까는 의문이 들었었다. 잘 모르겠다. 그도 나처럼 저승에 가보지 않았으니,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 않았을까?

서울역에 가면 꼴불견들을 늘 목도한다. 그중의 하나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고 아무나 걸리기만 하면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를 목이 쉬도록 하는 사람들이다. 부담스럽다. 피하고 싶을 때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은 하도 주억거리면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길래 농을 걸어봤다.

“안 가본 저승이 그리도 좋다고 하던가요?”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귀가 어두운지, 눈치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러저러한 종이 쪼가리들과 함께 지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가만 냅두는 도리 외에는 없다. 기염을 토하고 달려드는 사람을 피할 묘리가 없다. 자기가 안 가본 저승이라고 마음대로, 함부로 나대는 사람들이 이제 가엾지도 않다. 나도 안 가본 세상이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에 대해 확신이 없다. 그러니 대꾸조차 할 수 없는데, 논리적으로 설명은 할 수 없으나 이상하게 그들을 이제는 더 이상 선한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자꾸 눈이 사나워진다. 흐린 눈으로 세상을 보니 다시 세상을 흐리고 있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저렇게 살다 죽으라고 해.’라는 오만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서울역은 더운 날씨에 사람을 기다리는 일보다 각종 소음을 받아내는 일이 더 힘든 공간이 되었다. 갈 때마다 서글프기도, 열을 받기도 하는 공간이 서울역이다.

꼭,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엮이는 말이 ‘교회 나가세요.’이다. ‘천국행 티켓’이 ‘교회 출석’으로 변질된 전도 행위다. 차라리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에서 끝내면 최소한 부아는 돋우지 않을 것 같다. 이 말을 들으면 예수를 ‘알아가려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천국에 가려면 교회를 가야 한단다. 믿기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천국’ 가는 조건이 ‘교회에 나가는 것’이 되어 버린 이 땅의 기독교가 얼마나 더 기생할 수 있을까?

감을 심으면 감이 나는데, 예수 말씀으로 세웠다는 교회에서는 예수가 심지 않은 말들이 나와 무성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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