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고 늙을 수 없는 것
마음만은 이팔 청춘
80대 노인 세 분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했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모르겠다. 시골에 계신 알거나 모르는 이들은 80이 가까운 나이(연세를 쓰기에는 아직은 너무 꼿꼿하니 굳이 나이)에도 자신 몸이 남의 손 타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아직도 당신의 삶과 관계된 일들을 남의 손에 맡기는 법이 없다. 어디 우리 형부만 그런가?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기에는 현실이 녹녹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평생을 남의 손 빌려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이들과 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 곁에 계신 어르신들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성가싫도록 뭔가를 요구한다. “물” 하면 물을, “이쑤시개” 하면 이쑤시개를 대령해야 한다. 일거수일투족에 다 마음과 몸을 써야 한다. 물론 내 노파심이 한몫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손이 많이 가는 것은 확실하다. 손님의 한나절 한가로움은 주인에게는 한나절 번거로움이라고 하지들 않던가! 그들이 오고 가면 내 일상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인다. 어디 일뿐인가? 일보다 마음이 더 꼬이고 얽힌다. 그게 문제다. 일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꼬인 마음을 풀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자칫 어설프게 풀려고 들었다가는 더 얽히고설켜 실마리마저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니 문제라면 문제다. 꼭 한 푸닥거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이기에 내 곁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피느라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그러니 없던 잡음도 생겨 헝클어진 실타래에 엉기다 보니 명절이고 뭣이고 이름있는 날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알약을 한 주먹씩 매 끼니 앞, 뒤에 드시고, 건강 보조제란 보조제는 다 챙겨 잡숫는 것 같은데도 굽을 데 굽고, 꼬부라질 데 꼬부라지고 흐릴 데 흐려지고, 무뎌질 데 무뎌진 사람들! 마음까지 늙으면 얼마나 금상첨화겠는가만 마음만은 이팔청춘인 사람들! ‘꼰대 짓’의 발원지. 그 늙지 않고 늙을 수 없는 마음. 그곳에서 늙을 수 없는 것들이 세월을 거듭하며 곰삭은 냄새는 견디기 어렵다. 내가 유별스럽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사’자 들어간 사람들이 특히 늙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 중 으뜸인 것 같기도 하다. ‘잘난 체하기’, ‘거드름 피우기’, ‘근엄한 표정짓기’, ‘남의 손 대가 없이 빌리기’ 등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그들끼리 무슨 합의라도 보고 행동하는 것처럼 비슷하다. 평생 대접만 받으면서 산 사람들의 불치병이 있는가 싶기도 했다. 남의 수족 부리는 것을 마치 제 수족 부리는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 남의 시간, 돈, 몸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부려온 사람들의 특권 의식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들과 대면하는 일은 늘 어렵다. 그리고 좀 불쾌하다.
식당 아주머니가 간장 게장을 리필해 주다가 내 앞자락에 국물을 쿡 쏟았다. 평소에 비린 것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고, 그 구리구리한 냄새며 옷에 묻은 얼룩 자국 또한 난감했다. 정작 나는 “물수건만 넉넉하게 주세요.”라고 끝냈는데, 목사라는 양반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난리였다. 바로 전에도 서울 집에 택배를 경비실에 두지 않고 문 앞에 두고 갔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타 지역에 가 있다는 택배 기사에게 당장 가서 경비실에 갔다 두라는 둥,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둥 난리를 부린 통에 주변 사람들 보기 민망했고, 그 때문에 나는 헛 젓가락질만 하고 있던 차인지라 엎어진 간장 게장 국물보다 수선 피우는 상황이 더 부끄럽고 창피했다. 처음에는 몹시 미안해 하고, 죄송해 하던 아주머니도 나중에는 얼굴이 굳어져 그에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빛과 고성과 날 세운 말로 자신의 실수에 대한 보상을 다 했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사람이란 자고로 그런 것이다. 공짜가 어디 있나? 실수를 욕으로 받았으면 되는 것이지. 암튼 계산하러 조금 일찍 계산대에 갔더니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회를 아주 안 드시는 것 같던데요.”라며 낮게 다시 사과했다. 뭐 작정하고 벌인 일이 아니면 마음 쓸 일도 아닌데 싶어 마음 쓰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 그날 내 앞자락에는 간장 게장 국물보다 더 진한 말 구린내가 얼룩졌다.
마음이 늙거나 늙지 않거나 간에 인생의 종착역은 ‘무덤’이다. 그날 저녁 시원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 둔 것을 굳이 마다하고 좁은 방으로 잠자리를 옮긴 그 불편한 상황을 곱씹으며 종착역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불철주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걸어갈 수밖에 없는 나를 향해 물었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늙을 것이냐? 늙고 있냐?”라고.
마음이 늙지 않는 이유는 누구나 살고 있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만큼은 그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특별한 삶, 남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가면 삶에 그 어떤 매개체도 개입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들의 삶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그들을 만나면 나이가 많든 적든 생각이 단순해진다. 그냥 사는 것이고 살면 된다. 그들을 보면 연민은 들지언정 마음이 혼탁해지는 일은 잘 없다. 덥고 습한 날 시원하게 들이켜는 냉수 같은 사람들과 만나면 나 같은 사람은 뼛속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지키지 못할 결심을 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객기를 발동시켜 전원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마냥 자연이 그립거나 좋아서만 전원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과 나 사이에 끼인 그 몹쓸 비현실적인 삶의 조건들, 대부분은 책에서 배웠거나 귀동냥을 했거나 한 것들이 나의 익숙한 일상의 삶을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현실과 나 사이에 낀 것들은 대부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삶을 살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작 익숙한 일상의 삶을 벗어나고 싶어서 하는 독서나 여행이 더 삶을 같은 자리에서 되돌게 만든다는 느낌. 몸으로 배우지 않은, 머리로만 배운 것들이 마음을 늙지 않게 방부제 역학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식들이 상투적인 현실을 창조하고 그 상투적인 현실의 반복이 마음을 틀어쥐고 몸 따로 마음 따로 놀게 만든다. 그 결과는 삶이 현실의 분리로 욕망이라는 추상만 남는 삶을 계속 창조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늙어도 늙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 입만 살아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다. 팔순이 넘었거나 백수를 바라보거나 여전히 입은 열려 있고, 눈동자는 바삐 움직이고, 귀는 쫑긋 세워져 있다. 세상은 이미 그들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눈치 없이 늙지 않은 마음만 앞세워 말세를 올리고 세상 종말을, 세상 타락을 운운하여 어지럽기 그지없다.
어쩌다가 미술 전람회를 가면 맞닥뜨리는 것이 화가만의 특정한 감각에 기초하여 그려낸 화가만의 특정한 현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림에 일가견이 없는 평범한 나로서는 불편하다. 아마 낯선 세계에서 느끼는 그 알 수 없음에 대한 불쾌함이 불편한 심기로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불친절한 제목인 ‘무제’를 붙인 그림 앞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다가 느낀 바가 있었다. 곁에서 나직나직 그 불편한 그림에서 받은 감명을 소곤거리는, 뭐라도 자신의 특정한 감각을 사용하여 해석하는 것이 습관화된 옆지기를 보면서 내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모두 비현실이고 초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각자만의 특정한 감각에 기초하여 만들어 내는 현실은 타인에게는 모두 낯선 풍경이고 그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현실이고 초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그림, 그것이 진정한 현실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듯이.
중요한 것은 비현실, 초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다 각자의 현실, 다른 현실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생각. 삶은, 끝이 ‘무덤’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
마음만은 늙을 수 없는 노인들과 삼사일을 살면서 고민했던 일들이 고작 이것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