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

그에게서 권력을 빼면?

by 이미숙

3사 방송만 나오는 텔레비전에서조차 틀기만 하면 그의 뉴스가 지치지도 않고 나온다. 좋든 싫든 봐야한다.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사람의 또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작태들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네.'

답답하고 어처구니없어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도대체 그들을 내 좁은 식견이나 안목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자리, 그 위치에 서 보질 않아서 그런가 싶어 옆에 있는 사람한테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물으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왜 굳이 이해하려고 애써?"


내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겠지만 범법을 해도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같은 느낌마저 매체가 연일 양산한다.

도덕이니 윤리니 그런 것 다 뭉개는 말과 행동이 난무한다.

오늘 체포 했나?

오늘은 체포됐나?

오늘은 설마 체포했겠지? 라는 생긱을 여러 날 하고 살다보니, 실시간 뉴스를 보기 위해 핸드폰으로 다양한 매체를 주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속시끄러운 매체들과 사람들이 퍽이나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중이다.

이제 도덕이나 윤리 시간에 양심이니, 도덕이니 뭐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버티라고,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주변 깡그리 개무시하고 제 곤조대로 밀고 가라고 가르치면 될 것 같다. 아니 가르칠 필요도 없이 이미 배울 사람은 다 배웠을 법하다. 모든 사람들의 반면 교사 노릇을 그 혼자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보다 몸소 배운 것 많은 다음 세대들 중에 그다운 그, 혹은 그보다 더 그다운 그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해서는 안 되는 걱정을 해 보기도 한다.


법 공부를 9수까지 해 가면서 검찰청장까지 했다는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에서 도망친 사람의 표본인 듯 하다.


그만 그럴까?

그를 에워싼 사람들을 보면 참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내 둔한 눈에는 그를 이용해 그들이 원하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또 다른 그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또 다른 포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수가 아닌 몇 수를 더 앞에 두고 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일단 무명인들이었던 그들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효과만큼은 확실히 수확 중인 것 같다.

시골 골짜기에 박혀 사는 내 눈에도 그런 조짐들이 들어오는데 눈 밝은 사람들 눈에는 얼마나 훤히 보이겠는가?

이런 저런 일들을 보다 보면 경상도 문딩이 말로

'속이 희딱 디비진다.'


가끔씩 고집 센 아이들과 기 싸움을 할 때가 있다.

도대체 말이 씨가 안 먹히는 아이들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러다가 할 수 없어 학부모를 대면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아이들 학부모를 보면 이해가 될 때도 있다. 아니 십 중 필구는 그 부모를 보면 그 아이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부모를 보고 포기를 하는 아이도 있고(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환경이라서), 부모를 보고 연민이 생기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더 열심히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가장 중요한 환경이라서 그렇다.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사람이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법을 배운 것이야?'라는 말을 했단다. 이 말에는 최고라 자부하는 교만과 자만이 서려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코웃음부터 나왔다. 법꾸라지 양성소가 일류 유명 대학교 법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돈 매고 밭 매는 사람들이 법을 흐리거나, 법꾸라지가 하루 아침에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돈두렁 밭두렁이 하루 아침에 법꾸라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개 풀 뜯어 먹는, 반성이라고는 1도 없는 자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 교수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배우긴?

가르쳤든 안 가르쳤든 그곳 출신 아닌가 말이다. 먼저 그곳 탈탈 털어 소제하는 일이 먼저였다는 생각에 입이 썼다. 그곳에서 배우고 나온 사람이 뻘짓하는 바람에 이 엄동설한에 죄없는 시민들만 추운 거리에서 목청 터지고 살 터지며 가슴 쥐어 뜯으며 고생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왜 그 교수는 그를 키워낸 가장 중요한 환경이 그가 뿌리 박고 있는 서울대학교 법대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그 말을 하기 전에 그들은 그런 법꾸라기 본산인 그 명당에 대한 쇄신을 먼저 생각했어야지 않을까?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 법에서 멀어진 사람이 그 혼자였다면 이리도 나라가 시끄러웠겠는가?

그 혼자만 법 공부 9수까지 해 가면서 법에서 멀어졌더라면 온 나라가 이리도 멀미와 흉통을 앓고 있겠냐 말이다.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이 그 좋은 법을 공부해서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는 신인가 묻는다.


신이 아니고서야 그는 혼자서 수백 수천만의 가슴에 불을 활활 질러 밤이나 낮이나 거리로 내 몰수가 없지 않은가?


왜 그들은 그에게만 열심히 공부해서 법으로부터 멀어진 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는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자를 만들어 간 곳이 그곳이고, 그들이었음이 빠진 것이다. 그를 에워싸고 그를 대변하는 사람들을 보라!

이해가 가지 않는가!


어쩌면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가 공부한 곳을, 그를 가르친 사람들을 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법의 기초를 세웠던 곳을 알고 나면 비로소 그가 이해가지 않을까?그뿐만 아니라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교묘한 말들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해를 흐리는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농부들이 못자리를 보고 벼의 미래를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못자리가 고르지 않으면 모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무지랭이 농부 우리 아버지도 알았던 사실을 그들은 왜 모를까!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사람도 알터인데 그 교수가 대 놓고

'그는 도대체 법을 어디서 배운 것이야?'라고 질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참 서글펐다.

또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서글퍼질지!


누구나 꿈을 꾼다. 오늘도 내일도 꿈을 꾼다. 그러나 모두가 그 꿈에 예지몽이니 신의 예언이니를 굳이 끼워넣어 해몽을 해서 주변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또한 장난삼아 꿈팔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 꿈에 사람들을 매달아 희망 고문이라는 것을 하거나 겁박을 하지도 않는다. 물론 남다르게 꿈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꿈은 어디까지나 개인사다. 그 개인사를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각색해서 대중을 혼미하게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기 대통령감을 자기 꿈에 보여줬다는 둥, 그이 앞날이 어쩌겠다는 둥 말이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어떤 이의 흥망성쇄는 그 사람 행동거지를 보면 거개는 다 알 수 있다. 그걸 가지고 무슨 계시를 받은 듯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재주라면 재주다. 남의 미래를 굳이 입술에 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이 천국을 가든 왕을 해 먹든 자기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젯밥이다. 그게 다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다. 법든 종교든 그 법에서 멀어지면 진리에서 또한 멀어진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연일 보여주는 듯 하다.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의 그 뻣뻣한 손과 그 거친 입이 그를 되려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그 주변은 왜 모르는 것일까?

그와 나의 공통점은 '예수'를 신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난 종교도 신의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자기가 신으로 모시는 신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예수'라는 사람의 삶에서 세상 사람들이 그 무엇을 생각하든 그 생각하는 것을 빼고 남는 것은 '사랑', 자기와 같았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그의 삶 이외는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설파했던 천국은 그 무엇도 아닌 '예수가 살았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산했던 삶 말이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강도들과 함께 처형을 당했던 발가벗겨진 그의 삶 말이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본 적 없는 사람을 존경한다는 말도 어패가 있고 진실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솔직하고 용감했고 멋진 삶은 본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있다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었다. 그곳에서 그를 찾았고 나는 또 그를 버렸다. 적어도 30여년 넘게 그를 배우려고 들락거린 곳이 교회이고, 배우고 익한 것이 성경책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 배우려고 했던 것이 그의 삶이었고 그의 삶이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이고 내가 갈 내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게든 적게든 난 분명 '예수'라는 사람의 영향권 아래에서 자란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교단에서 설파되는 천국이 천국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 더도 덜도 아닌 천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교회에서도 스스로 발을 뺐다. 자본 이외 혹은, 성도 간 교제 외 별다를 것이 없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공간에서 더 버티기 어려웠다. 갈등이 참 많았다. 교회를 버리는 것이 종교를 버리는 것이 예수를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십수년에 걸쳐 고민을 했다. 그러나 사람 간 교제로 몸살을 앓으며 살아가는 내가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발을 빼기는 쉽디 않았으나 우선은 난 발을 뺐다. 그러면서 예수는 필요에 의해 찾는 존재라기 보다는 그녕 그의 족적을 따라 가야 할 사람으로 되었다.


왜 종교인들이 저리도 정치적인 일들에 열정적인가?

궁금했다. 자기 수양하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혹은 수천을 거느린 종교 지도자라면 그 종교인 다독거리고 교육하기도 바쁠 시간에 왜 저렇게 예수라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맨 부류들이 하는 일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설까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들의 영상을 봤다.

예수는 없었다.

그 어둡던 시대 몽매한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몸을 던져 완성한 예수의 그 아름다웠던 비유(성경)들은 상대방에게는 칼로, 자신들을 위해서는 방패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가 체포된 일보다

그가 구치소로 간 일보다 더 참담한 일이다.


그 종교인들의 등에 업히려는 사람들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구치소로간 사람에게서 권력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연일 예지몽이니 예언이니 떠드는 그 종교인에게서 그 구차한 교설들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 사람에게서 그가 가진 지위, 권력, 세상것들을 빼고 남는 나머지가 '그'라잖은가?

내게서 종교인, 교사 등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은 더하기가 아닌 빼기를 하면서 나를, 혹은 너를, 그리고 그들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불행한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