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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해석

삶이 쪼그라들고 병들게 만든다.

by 이미숙

교실에서 흡연을 했단다.

신고가 들어왔고 조사가 들어 갔고

아이들은 서로 말을 마주어 발뺌이란 것을 했고

개중에 마에 엇박이 생기면서 모두 들통이 났다.

그러는 와중에 학생이 담임 선생님을 공개 저격하는 일까지 생겼고 학부모가 개입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게엄이 선포 되었다.


학년 부장으로서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어 사건을 넘겨받아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고 다시 시작해 보자 했다. 담임 선생한테 뻣대던 놈까지 이실직고를 했고 같이 피웠다던 학생까지 싹 불었다.


끝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부모님까지 갈 것까지 없었다. 스스로 다 알고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겠노라 했고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끝까지 나머지 한 학생이 아니라고 버티는 일이 생겼고, 시끄러워졌다.


그게 시끄러울 일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그 어머님은 단어 하나하나를 각색했다. 내 의식 수준으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분노하고 열을 내고 많은 말을 해서 얻어가는 것이 뭘까도 곰곰이 샹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아이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나머지 한 학생이 피운 것 맞냐고 재차 물었더니 말을 맞추기로 했는데 우리가 선생님한테 말 헌 것을 그 학생이 모르고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쯤 되면 확신에 가깝게 그 학생도 피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누차 내 생각을 말했다.

네 명의 학생들이 거짓말로 한 명을 모함할 일이 없었고 각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기로 한 상황에서 또 다른 작당 모의로 또 다른 불란을 일으킬 만큼 못된 아이들도 아니었기에 난 강력하게 가정에서 지도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 언성을 높여 내 뜻을 관철시켜 보려고 물리력을 행사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걸 배우지를 못 했으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업 중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어 언성을 높여 본 기억도 없다. 모르겠다. 혹시 누군가가 그런 사실이 있었노라 직고를 해 준다면은 몰라도 그런 적이 기억에 나질 않는다.

우선 화가 나면 입을 다무는 유형이고 말이 없어지는 유형인지라 나와 살아본 사람은 내 침묵이 무섭다고들 하는 유형이다.


그 학부모는 나를 순간 웅변가로 만들기도 하고

일을 두서 없이 처리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말들을 다변화하는 표정, 음성, 몸짓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한 문장은로 요약하면

"우리 애는 안 피웠답니다."였다.


나중에는 지쳐서 그렇게 믿어도 좋다고, 어머님 믿고 싶으신 대로 믿으시면 된다고 부탁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3시간을 나와 담임을 붙잡아놨다.


참 그랬다.

그 부모님은 사건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해석을 경험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찌 그리 사람을 몰아세울까 싶기도 했다. 흡연 사건에 대한 억울하다는 해석,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선생이란 사람들이 우리 애를 못 믿고 그러냐는 화가나는 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학생의 학교 생활을 직접 지켜본 사람들에 대한 생각, 주변의 학생들의 관점이 고려되지 않은 불행한 해석이 문제는 아닐까 싶어 이러저러한 내 생각은 다 접었다. 잘못 된 해석이 아니라 불행한 해석이 얼마나 삶을 쪼그라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고민을 안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계엄 선포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봤다. 평소에 텔레비전도 잘 안 보는데 그날은 야자감독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면서 틀었던 기억이 난다.

아량한 그 교칙과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난리통을 겪고 있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어 순간 내 뱉은 단어가 "제 정신이야? 지금 제 정신으로 저짓을 하는 거야?" 밖에 없었다.


불행한 해석이 우리 삶을 얼마나 나락으로 패대기 치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불향한 해석이 우리 삶을 얼마나 병들고 쪼그라들게 만드는지 뼈 저리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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