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달리세요
하루키는 달리며 배웠다.
앞서 달리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것이 세계가 이어져가는 방식임을 소박하게 실감한다. 추월을 당해도 분하지 않다. 그녀들에겐 그녀들만의 페이스가 있고, 나에겐 나의 페이스가 있다. 서로 다른 시간성을 품고 달린다는 것, 바로 그 차이와 간격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p.146)
그는 나이를 먹어가며 깨달았다.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 젊을 때처럼 속도를 낼 수 없다는 사실조차 담담히 받아들인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42킬로미터를 완주하며 느끼는 충족감이었다. 요절을 면한 자에게는 늙어갈 권리가 주어진다며, 육체의 감퇴조차 하나의 영예로 여길 수 있다 했다.(p.187)
하루키에게 나이 든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다른 빛깔의 성취였다. 그것은 삶의 리듬을 놓지 않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였다.
마라톤을 앞둔 그는 종종 눈을 감았다. 브루클린의 다리를 건너고, 할렘의 거리를 가로지르며, 수만 명의 주자들과 나란히 달리는 자신을 그렸다. 센트럴파크의 나무 그늘을 지나 결승선에 다다르고, 고풍스러운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완주의 기쁨을 음미하는 장면까지. 상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온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예행연습이었다.(p.203)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게 하는 힘, 끝까지 달리게 하는 동력은 바로 이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달리기는 고통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삶을 즐기는 방식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42킬로미터를 달리겠는가.
이 고백은 글쓰기를 떠올리게 한다. 글을 쓴다는 것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안 한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이어간다.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기계처럼 무표정하게 글을 찍어내는 존재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오래 자기 문장을 지켜내려 애쓰는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그리고 충족감을 얻기 위해서.
9월의 무지개 도서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정하면서, 문득 김민섭 작가의 일화가 겹쳐졌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에서 작가는 “#몰뛰작당”을 제안했다. “몰래 뛰는 작가와 당신”이라는 뜻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달리고, 해시태그 하나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서울의 강변에서, 부산의 바닷가에서, 태국의 어느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달렸다. 만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덜 외로워질 수 있었다.
선선한 9월 밤, 무지개 작가님들과 함께 달려볼까 하는 상상을 했다. 현실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마음속에서 서로의 발걸음을 느끼고 있었다.
글쓰기 역시 그렇다. 고독한 행위이지만, 무지개 매거진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책을 읽고, 각자의 문장을 모으며, 우리는 이미 ‘몰래, 함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도시, 다른 일상 속에서 각자의 템포로 쓰고 있지만, 결국 한 권의 책을 붙들며 함께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달리며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면의 우물 바닥을 응시하듯,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의심 많은 자신과 마주했다. 그 무거운 성격조차 낡은 보스턴백처럼 등에 지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p.229)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저마다의 보스턴백을 짊어지고 산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무게이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질 게 없어 결국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글쓰기도 그런 짐이다. 무겁고 성가시지만, 그것을 버리지 않고 끌고 오기에 우리의 시간이 의미를 갖는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또 한 달의 끝자락에서도
즐겁게 달리자. 즐겁게 쓰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키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어떤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완주해야 할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그 한 문장 속에는, 끝까지 자신답게 살아낸 한 사람의 고백이 담겨 있다.
삶도 결국 달리기와 다르지 않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넘어지고, 잠시 멈춰도,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일.
그 꾸준함이야말로 인생을 완성해 가는 힘이다.
무지개 작가님들께 묘비명을 요청했다.
각자의 페이스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문장을 들어본다.
다정한태쁘 : 여여하게 살았노라
김수다 : 의사, 작가, 그리고 러너
지혜여니 : 우아한 미소로 사랑하며 나무처럼 살다 흙으로 돌아가다
윤슬 : 일상의 행복을 곳곳에서 누리고 갑니다
바람꽃 : 예쁘게 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말한다.
“우리, 오늘도 즐겁게 달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