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간이 갇히다

블루 아워 -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by 바람꽃 우동준

2011년 3월의 어느 날


“헉”


뒤척이다 쌓아 두었던 책 더미가 쓰러져 버렸다. 하필이면 정확히 배로 떨어지다니 한참을 배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동생이 낑낑대는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쪽팔려서 이불 밖으로 손만 내밀고 가라고 손짓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11시가 넘었다. 요즘은 대개 이런 식이다. 밤에는 잠이 안와 늦게까지 뒤척이고, 눈을 뜨면 점심이다.


‘시간 잘 가고 좋네.’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본다. 쓰러진 책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내 방은 충분히 난장판이다. 오늘은 2011년 3월 29일. 이사하는 날은 2011년 4월 1일. 그리고 내 입대일은 2011년 4월 4일이다.


오늘까지 짐을 정리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사를 해서 참 다행이다 싶다. 덕분에 입대 전의 그 싱숭생숭한 마음을 몇 시간 동안이나마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보일러를 켜고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금방도 나온다.


솨아아-


생각해보면 참 고맙다. 군대 간다고 바쁜 아침인데도 새벽같이 일어나 밥 해놓고 나간 엄마, 자기도 귀찮고 바쁘고 짜증 날 텐데도 오빠 군대 간다고 작은 거 하나까지 양보해주는 동생, 털도 세워주고 하악대는 우리 집 고양이.


“빨리 가야겠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다.


샤워 후 서랍을 뒤져 먼저 입대한 친구 놈들의 편지를 찾아 읽는다. 편지엔 뒤늦게 입대하는 날 향한 웃음이 가득하다. 동네 친구들 7명 중 내가 가장 늦게 입대한다. 가장 빨리 입대한 놈은 이제 1년이 지나간다. 친구들이 이야기와 인터넷을 게시물을 보니 매직이랑 일기장, 스킨, 로션, 여분 안경, 수첩, 대일밴드, 신분증, 영장 정도면 된다고 한다. 현금도 만원 이상은 들고 가지 말라는 말도 있었다.


‘시계를 아직 못 구했네’ 시계 말고는 얼추 다 준비한 듯하다. 막상 짐을 싸고 보니 크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 괜히 허탈해지기도 하고, 이제 실감이 나 작은 종이백을 아무도 못 보게 책상 밑 구석에 밀어 넣었다.





밤 9시-



띵똥-

“예, 보좌 신부입니다.”

“신부님~ 저 동준입니다.”

“예~ 왔네요. 잠시만 기다려요.”


신부님이 밝은 얼굴로 뛰어나와 문을 열어 주신다. 신부님이 묵으시는 사제관. 보일러를 세게 틀지 않아도 항상 따뜻하고 포근하다. 보이진 않지만 사람의 기운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방안을 둘러보니 참 소박하다. 꼭 필요한 것들만 있는 걸 테지만, 그럼에도 꽉 차 보이고 가득해 보인다.


“어때요? 이제 며칠 안 남았죠?”

“진짜 내일모레면 갑니다. 이렇게 날짜가 가까워 오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하네요.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더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요? 좀 아쉽네요. 더 슬픔에 찬 표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시익 웃는 신부.


“담배 한 대 피워요.”

“네. 신부님.”


우리는 작은 사제관 거실에 앉아 귤과 차, 재떨이를 가운데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군 시절이 어떠셨나요?”

“나는 저기 철원에서 군생활을 했거든요. 이등병 때는 엄청 힘들었죠. 맞기도 엄청 맞았고, 욕도 엄청 듣고. 이등병 때 가자마자 큰 훈련을 하나 뛰는데 어찌나 어리바리했는지. 사람 하나 안 죽인 게 다행이죠. 그렇게 힘들게 보내다 일병이 되니까, 또 그때부턴 그래도 군생활 좀 했다고 뭘 해야 할지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 이후에는 나름대로 적응하며 몸 건강히 군생활 마쳤죠.”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다 지나가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해낼 수 있어요. 행군을 할 땐 기도해봐요. 한발 한발 갈 때마다 묵주기도 하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금세 지나 있어요. 아!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 주신다.


“이번에 제거 사면서 같이 샀어요. 11월이 생일이죠? 토파즈란 광석이 11월의 광석이래요. 또.. 아직 못 샀지요?” 웃으시면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서 주신다. 신부님이 내게 주신건 토파즈 판에 묵주가 박혀있는 작은 카드와 G-SHOCK 시계.


“아니에요 신부님. 시계는 너무 과한 선물이에요. 제가 내일 사러 갈려고 했어요.”

“그냥 쓰세요. 튼튼한 거 써야지 훈련할 때도 안 부서지고 군 생활하는 내내 쓸 수 있어요.”


못 이기듯 감사히 받아 손목에 차 본다. 또 받기만 했다. 난 늘 받기만 한다. 손목을 돌려 시계의 시간을 본다. 시간은 여전히 잘 흐르고 있다.


“신부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네! 잘하고 와요. 기도 할게요"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 이런. 늦은 밤이 되어 버렸다.


춥다.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며 다짐했다. ‘정말 잘 갔다 와야겠다고. 부끄럽지 않게, 다 끝내고 와서 멋지게 인사드려야겠다고. 기도 해 주신 덕분에 건강하게 전역했다고 말해야겠다고’


3월의 밤은 아직 차가운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이상하게 그래서 더 상쾌한 공기였다. 이제 2일, 2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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