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중
《사투리에 묻어 있는 끈끈한 정은 부정을 의리로 여기게 하고 협잡을 지혜로 둔갑시킨다. 사는 일이 늘 그런 것이라고 믿게 하는 사투리의 너스레는 모든 죄책감을 완화하고 털어낸다.》-
.
. '우리가 남이가.' 이 한 문장에 근대사의 모순이 녹아있다. 정의를 위한 내부고발은 조직을 배신한 행위가 되고, 타인의 이익을 강탈해 내 지인에게 넘긴 일은 의리가 된다. 함구해주고 감춰주는 일이 '정'이란 한국적 가치로 승화된다.
우리가 남이냐는 질문엔 우리가 아닌 한 그 누구도, 끝까지 타인으로 남을 것이란 비장한 결의가 담겨있다.
타인은 다른 '인간'을 의미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타인이 되는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거세당한다. 왜냐면 그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 학생운동가를 고문하던 이들이 집에 전화해 아빠 오늘 일해서 늦는다고. 사랑한다고 했단다. 모델을 꿈꿨던 여성을 가둬놓고 추행과 억압, 공포로 셔터를 누르던 이들이 걸려온 전화에 지금 일하는 중이라고 했단다. 고문을 하던 그들은 자기들끼리 우리였고, 검은 렌즈를 들이댔던 남성들도 자기들끼리 우리였을테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패거리 문화는 아직도 그 뿌리가 깊다.
사람 사는 일 다 그렇지. 정말. 과연 늘 그런가. 패거리의 협잡질을 배우는 일이 세상을 배우는 일인가. 우리의 끈끈함을 위해 타인을 소비하는 일이 늘 그런 일인가.
우리가 남이가. 응 우리는 남이야.
아직도 쉽지 않은 태도다. 따돌림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거부한 순간부터. 난 늘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비겁한 배신자가 되기도 했고 찌질이라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했던 사람이 자신의 편함을 위해 따돌림의 그룹으로 들어가 우리가 남이냐며 새로이 날 밀어내기도 했다. 늘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가 되어도 죄책감만은 잃을 수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남이였고 끝까지 남이다. 무뎌지고 무뎌져 내 입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나올바엔 끝까지 혼자서 가는 게 낫다.-
.
.
.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중 <사투리의 정서>의 글귀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