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에 믿음을 지킨다는 것
믿음은 필연적으로 세 가지 질문과 마주한다.
'무엇을 믿느냐' '왜 믿느냐' '믿음을 실천하느냐'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물음은 무엇을 믿는가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표면적으로 보면 로마 가톨릭이라 말하는 '천주교'에 소속되어 있다. 매주 일요일 주일을 지키며 미사를 참례하고, 음식을 앞에 두곤 감사를 식사가 끝난 후엔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는 짧은 미사를 바친다. 왼손에선 묵주반지가 몇 년째 빠지지 않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헛헛한 마음이 들 땐 자연스레 성가를 찾아 묵상하듯 상념에 빠진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하지만 소속이 '무엇을 믿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천주교의 교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으로 오신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럼 나는 예수님을 믿는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자신 있게 답할 순 없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응답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과 비슷해서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믿는지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만이 안다. 하느님을 믿고 교회를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어디에 의지하며 살아가는지는 관찰되는 나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말과 행동과 신체를 뒤덮은 장신구는 십자가를 향할지 몰라도, 나의 안도하는 표정과 행복감, 평소 꺼내는 단어와 의지는 다른 것을 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느님으로부터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가, 통장 잔고로부터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고 있는가, 내 주식이 상승하기를 희망하고 있는가. 누구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에 나는 자신의 믿음을 앞서 소리치는 사람을 경계한다. 믿음은 언제나 겉모습이 아닌 행동으로 파악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 물음은 '왜 믿느냐'이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일수도 있고, 지상에서의 인맥 혹은 이미지를 위해 믿음을 치장할 수도 있다. 나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하느님을 위해서인가 나를 위해서인가.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나를 위해서 믿음을 붙잡는다. 내가 더 악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내가 더 자기 파괴적으로 작동되지 않도록 나를 붙잡기 위해 오늘도 믿음을 선택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곳은 오직 종교, 너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해주는 나의 종교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나는 과연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가. 내가 배웠던 그대로 나와 닮은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며, 온유한 마음으로 내가 아닌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의 실천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소리쳐 말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일 텐데 서른두 살,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다.
코로나로 부활부터 성탄까지 미사를 잃었다. 조금은 귀찮고 조금은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했던 청년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얼마나 나를 회복케 하는 시간인지를 잃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여전히 충동적이고 염세적이며 성급하고 비관적이다. '괜찮다 괜찮다' 나를 토닥거려주는 시간을 통해 겨우 한주씩 웃음을 유지하는 나였다.
잃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무엇을 믿고, 왜 믿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잃고 나서야 알았다. 2021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엄혹한 시기, 직접 바다를 건너가 서품을 받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한 한반도의 첫 사제다. 김대건 신부님은 옥중에서 이런 물음을 받았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가 받았던 물음 앞에 나도 마주 서있다. 나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나는 정말 천주교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