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의 <아몬드>를 읽고
아이들에게 읽히면서 같이 읽었다.
3월 말 봄꽃이 필 준비를 할 때부터, 동백, 목련, 개나리, 벚꽃, 라일락이 한꺼번에 피기 시작하던 4월 초, 기상 관측 최초 눈이 내린 4월 중순이 지날 때까지. 아이들에게 읽히면서도 성장 소설에 심드렁하며 이번 봄은 참, 유난하다고 생각할 때, 툭 튀어나온 윤재의 마음을 만났다.
"나뭇가지가 창문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끝엔 조그마한 개나리 순이 돋아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뭇가지를 반대 방향으로 틀어 주었다. 꽃이 햇볕을 받아야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꽃이 햇볕을 받아야 성장한다는 건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개나리 순을 햇볕 쪽으로 방향을 틀어준 행위는 막 태어난 어린것을 위하는 마음이다. 어리고 약한 존재를 위하는 윤재의 마음이 한 발짝 다가왔다. 감정 표현 불능증(알렉시티미아)을 앓고 있는 윤재. 그를 성처럼 둘러쌓아 키웠던 할머니와 엄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함락된 요새에서 사람과 관계, 그 사이의 희로애락을 배워간다.
할멈과 엄마의 부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윤재의 세상을 넓힌다. 윤재에겐 다행히도 좋은 어른 심 박사가 있다. 윤재는 엄마 대신 심 박사에게 자신에게 일어나지만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질문한다. 심 박사는 윤재의 말을 들어주고,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열어준다. 윤재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어른,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으로 윤재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람. 머리로만 이해하는 윤재가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심 박사를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를 통해 윤재는 잃을 뻔했던 친구를 다시 얻는다.
곤이 윤재를 찾아온다. 누군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의 흐름이, 특별한 기운이 도달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가 있겠는가. 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들여다보면서 윤재는 곤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곤의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손을 맞잡은 할멈과 엄마 손의 온기를 깨닫는다. 영혼이 무너지지 않은 윤재는 곤과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관계의 행간을 채우려 가출한 곤을 찾아가 위험을 감수하고, 차마 자신을 보러 오지 못하는 친구를 찾아간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에 친구라는 심리적 안전망을 세워 놓는다.
사랑이 윤재를 찾아온다. 사랑은 세상의 냄새를 바꾸고, 계절과 그 속에서 무르익는 아이들의 냄새도 진하게 바꾸어 놓는다. 윤재의 요새, 헌책방에 찾아온 도라는 헌책에서 낙엽냄새가 난다며 그의 심장을 뛰게 한다.
"바람이 목적지를 바꾸었다. 도라의 머리칼이 천천히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애의 냄새를 실은 바람이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낙엽 냄새 같기도 하고 봄날 새순의 냄새 같기도 했다."
달리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강단 있게 삶을 개척해 가는 도라를 만난 윤재. 예쁨의 발견이라는 감정의 혼란, 사랑이 일으킨 혁명은 윤재에게 글의 행간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자신을 이해시킬 수도 없어 요새 안에 자기를 가두던 소년은 숨 안에 실려있는 사람들의 웃음과 울음을 진정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
4월이 끝나간다. 평생 듣고 써온 관용구처럼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재란 놈은 5월이 가장 나태한 달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아, 이제야 어르신들의 봄타령이 이해가 됐다. 그들은 한결 같이 "내가 이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으려나."라며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해마다' 이야기한다. 진부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의 생명이 봄처럼 계절 변화의 모진 시간을 버티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었나 보다. 봄을 다시 보지 못하는 건, 그와 연결된 여름, 가을, 겨울을 통째로 살지 못하는 거니까. 나이 들어가는 나는, 인생의 겨울을 살아가는 그들의 두려움을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한다.
주말부부를 하는 남편과 통화를 하던 어느 봄밤, 나는 재작년,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고백을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해마다 자연과 함께 바뀌는 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 빈머리 같은 곤이가 빨간 성인 잡지에서 리즈 시절의 브룩쉴즈와 현재 사진을 보며, '운명과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고는 있어도 상상이 안 되는 것. 늙는다는 것, 변한다는 것을 목도하고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겠다고 깨닫는다. 그럼에도 너무 어리고 젊은 곤은 강해지고 싶을 뿐, 시든 아름다움이 갖는 의미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허물어진 요새 안에서의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막, 인생의 봄을 맞이한 윤재.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답을 찾던 윤재. 어른이 된 그는 삶이 다가오는 만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만큼 부딪혀 보기로 한다. 친구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을 응원하며,
그의 스무 번째 봄엔 '설렘'이 함께하길 빈다.
-51번째 나태한 5월을 기다리며,
몸부림치던 51번째 봄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