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유럽자동차여행] Day 20

길을 잃어도 좋아

2019년 5월 6일


목적지를 정하고 떠나는 여행이 있는 반면에 어디로 갈지 모른 채 길을 떠나는 여행도 있다. 전자의 방법이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면, 후자의 방법은 예상 밖의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다.


어제 온종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우리는 이대로 발 도르차(Val d'Orcia)를 떠나기 아쉬워 이곳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숙소에서 토스카나의 푸르른 밀밭이 보이면 좋을 것 같아, 발 도르차 마을에서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옮겨왔다.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을 온 Angelo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2층은 본인들이 사용하시고, 1층을 에어비앤비로 운영하는 곳인데 방 앞 테라스에서 넓게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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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더 머무르게 된 숙소는 집 바로 앞에 파라솔과 벤치가 있고, 그 앞으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곳이었다.


숙소에 체크인 할 때만 해도 구름이 많았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맑게 개었다. 우리가 발 도르차에 하루 더 머문 이유는 '막시무스 진퉁집'이라 불리는 농가민박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농가민박은 푸르른 언덕들 위에 띄엄띄엄 하나씩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정문 입구에서부터 길 양옆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기다랗게 펼쳐진 이곳은 발 도르차의 대표적인 사진 스팟이기도 했다. 파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농가민박 그리고 양옆을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까지. 이 농가민박을 보는 순간, 이곳을 보지 않고 떠났으면 이곳의 진면목 하나를 놓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원 위로 하늘을 찌를 듯 뻗어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의 극명한 대비는 보는 순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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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찾은 좌표로 발도르차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양 옆에 병풍처럼 펼쳐진 멋진 곳을 발견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장군 '막시무스'가 고향집에 왔을 때를 떠올리며 수많은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어느 사진도 우리가 눈앞에서 본 감동을 그대로 담아주지는 못했다. 이대로 숙소에 돌아가기는 아쉬워 우리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차를 타고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달리는 동안 우리 눈앞에는 초원과 밀밭,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후 여섯, 따스한 햇볕이 밀밭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30여 분 정도 달렸을까, 우리는 어느덧 구글 지도에는 길이 없다고 나오는 작은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는 길. 하루하루가 여행인 우리에게 어제의 여행지 풍경조차 생생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오늘 보았던 이 풍경들은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따뜻한 햇볕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준 감동 때문이다.


KakaoTalk_20190512_182033919.jpg 동화 속 풍경 같았던 발 도르차의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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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여행도, 우리의 인생도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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