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타노는 리조또였다
2019년 5월 10일
내 인생영화는 '라스트 홀리데이(Last Holiday, 2006)'다. 이 영화를 어쩌다 보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려다가 이름이 비슷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감독도, 주연배우도, 영화의 줄거리도 모른 채 보게 된 영화는 2시간 동안 나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영화 첫 장면 뉴올리언스의 재즈가 흘러나오며 주인공이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좋았고, 주연배우인 퀸 라티파 특유의 영어 발음이 좋았으며, 뻔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내 인생영화로 남게 된 이유는 내가 아무런 기대감 없이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책도, 음악도, 여행도 모두 기대치가 낮거나 기대감이 없을 때일수록 예상치 못한 인생 최고작을 만날 때가 있다. 반대로 저명한 작가의 책이라서 혹은 유명한 관광지라 기대하고 마주하면 생각보다 감흥이 낮을 때가 많다. 아쉽게도 나에게 포지타노와 아말피는 후자였다.
바티칸에서의 감동을 뒤로한 채 우리는 로마를 떠나 포지타노와 아말피 해안을 볼 수 있는 살레르노 지방으로 향했다. 포지타노와 아말피는 유명한 관광지답게 숙박비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무척이나 비쌌다. 그래서 우리는 아말피 옆 항구인 마이오리 위쪽에 위치한 Figlino라는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마이오리 항구로 가서 차를 주차한 후 페리를 타고 포지타노와 아말피를 여행했다.
마이오리에서 포지타노로 가는 배 위에서 나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날씨도 화창했고 해안절벽을 따라 지어진 집들도 아름다웠지만, 사진으로 담을 만큼은 아니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포지타노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았기 때문일까. 나에게 포지타노는 친퀘테레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을이었다. (둘 다 해안절벽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집들이 지어진 구조라 느낌이 매우 비슷했다.)
포지타노에 내려 출출해진 허기를 채우기 위해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레스토랑을 검색할 때는 주로 트립어드바이저와 구글의 리뷰 평점을 많이 보는데 포지타노에는 평이 좋은 레스토랑이 많았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 마을을 돌아볼 겸 항구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레스토랑을 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에서는 분명 1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 길이 경사가 심하게 진 언덕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우리는 등산을 하듯 헉헉거리면서 20분을 올라가서야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해산물 리조또를, 아내는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했다. 같이 마실 와인을 주문하는데 0.5리터 하우스와인이 단돈 4유로였다. 리조또와 파스타 가격도 해안가에 있던 레스토랑들에 비해 저렴했다. 저렴한 가격에다 사람도 많지 않아서 음식 맛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음식을 맛보고 거의 눈물 흘릴 뻔했다. 내 인생 최고의 해산물리조또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밥보다 많은 싱싱한 해산물들과 짭조름한 간, 그리고 알알이 씹히는 밥알들까지. 나는 연신 인생 리조또를 갱신했다며 감탄하며 먹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 수준의 리조또를 먹으려면 꽤나 비싼 돈을 내야할텐데 우리의 인생리조또는 고작 만원대였다.
기대를 안고 왔던 포지타노, 아말피 여행은 우리의 높은 기대치 때문인지 큰 감흥이 없었지만, 기대감 없이 왔던 레스토랑에서 내 인생 리조또를 만난 걸 보면 여행에는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을 자주 느끼며 여행할 수 있는 걸 보니 우리는 운이 좋은 여행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