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를 갖는다는 것
2019년 5월 11일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편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꽤나 좋아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좋았다. 2013년에 나온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주인공인 쓰쿠루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로부터 대학교 2학년 여름 절교당하고, 색채 없이 살아간다. 친한 친구들 이름에는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흰), 구로(검정) 등 색채를 뜻하는 한자가 있지만, 그의 이름인 '다자키 쓰쿠루'에게만 색이 들어있지 않았고 그는 늘 자신을 색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색채를 갖는다는 건 자신의 취향을 확고히 한다는 뜻과 상통한다. 우리의 일상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선택의 결과들이 지금의 나를 이룬다. 하지만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색채를 갖는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그 선택을 '나의 주관'이 아닌 '타인의 시선' 혹은 '타인의 선택'을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재즈 음악을 좋아해 여러 아티스트들을 찾아 헤매다 Eddie Higgins Trio를 발견하고 그들이 연주한 'Dear Old Stockholm'을 즐겨 듣는 건 자신의 취향을 하나 만든 것이지만, 당장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지 몰라 우선 Melon Top 100을 재생시킨다면 아직 음악에 있어 자신의 색채를 가진 건 아니니까. 처음부터 자신만의 색채를 가질 수는 없다. 처음에는 남들이 많이 듣는 것 혹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다 보면 점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게 곧 나의 색채이자 취향이 된다.
여행도 그렇다. 같은 여행지라도 그곳을 여행하는 방법은 저마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유명한 관광지 앞에서 꼭 사진을 남겨야 뿌듯한 사람이 있는 반면, 조용한 동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그곳에서의 여행을 마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여행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방법으로 여행도 해보고, 저 방법으로 여행도 해보면서 자신의 여행 스타일을 만들어 나갈 뿐이다.
세계여행을 떠난 지 200일이 다 되어가는 우리도 우리만의 여행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도시 혹은 사람이 많은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자연경관이 좋은 한적한 마을들을 좋아한다. 여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무리하여 여행지를 방문하지는 않을 것, 숙소를 정할 때는 돈을 아끼지 말 것 그리고 다른 여행자들이 간다고 해서 무조건 방문하지 말 것 등 우리만의 규칙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마이오리 여행 3일 차, 오늘은 늦은 오후까지 숙소에서 밥해 먹으면서 쉬다가 근교에 있는 라벨로(Ravello) 마을을 구경하고 왔다. 라벨로는 아말피에서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마을인데 야경이 예쁘고,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멋진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오후 느지막이 방문해서 예쁜 빌라를 산책하고, 젤라또를 먹고 두 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왔다. 네이버에 있는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좋았다고 적어둔 여행지들을 모두 가지 않고 우리만의 호흡으로 일찍 돌아와 숙소에 있는 강아지들과 놀고 각자 글을 쓰고 책을 읽는 하루. 우리만의 여행 스타일로 여행지를 즐기는 하루가 편안하다. 우리의 여행에도 우리만의 색채가 만들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