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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유럽자동차여행] Day 73

단발머리에서 다시 똥머리가 되기까지 Written by 백수부부 아내

2019년 6월 28일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한 번도 귀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를 해본 적이 없다. 


앨범을 넘겨보다 기억이 나지 않는 6살 시절 단발머리를 딱 한 번 했다. 나쁘진 않아 보였지만, 그건 어린이 특유의 ‘발랄함’ 프리미엄이 붙어서라는 걸 안다. 혹시나 어울릴 수도 있지만 망할 확률이 더 큰 단발머리에 모험을 걸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귀밑 3cm’라는 두발 규정도 없었다. 늘 동경했던 단발의 세계에 서른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시도했다. 늘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내가 평생 다닐 줄 알았던 회사도 그만두었고, 신혼집의 전세금까지 빼서 세계여행을 떠나는 판국에 단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세계여행을 떠나기 5일 전 머리를 싹둑 잘랐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너무도 어색했지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느낌이 참 좋았다. 왜 드라마에서 여자들이 실연하면 머리를 자르는지를 알 것 같았다. 버벅대던 컴퓨터에 ‘리셋’ 버튼을 눌러준 느낌이랄까.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콜마르로 향하는 길에 자유의 여신상이 우리를 반겼다.
콜마르도 스트라스부르처럼 독일식 가옥들이 많았다. 콜마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콜마르의 쁘띠 베니스. 작은 마을이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어울리지 않았다. 


보통 한국인의 특성상 별로여도 ‘’괜찮다”라고 말을 건네는데, 새로운 머리 스타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머리했네?”에서 그쳤다. 오직 도치맘인 엄마만이 “예쁘다”라고 위로해주었다. 내가 봐도 안 예뻤기에 상처도 안 됐다. 예전 같았다면 머리자른 걸 후회했을 텐데, 남들이 뭐라 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번 ‘퇴사’와 ‘세계여행’이라는 카드를 지르고 나니 별로 두려운 게 없어진 것 같다.

     

예쁘진 않아도 무더운 동남아에서 치렁치렁한 긴 머리 대신 짧은 머리는 체감 온도를 2도 낮춰줬고, 머리를 감고 말릴 때마다 족히 20분은 더 빨리 말랐다. 요가 할 때는 잘 묶이지 않아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기 일쑤였음에도 짧은 머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랬던 내 짧은 머리가 이제는 똥머리가 될 정도로 길었다. 그만큼 백수로 지낸지도 오래됐다는 뜻이다. 동남아 못지않은 유럽의 무더위를 겪고 있자니 말끔하게 묶이는 똥머리가 단발보다 나은 것 같다.     


역시 단발과 장발 모두 각자의 장단점이 있던 것이다. 묶이지도 않던 머리가 이젠 묶이다 못해 똥머리가 될 정도로 길 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이 여행이 내가 찾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여행 후의 삶은 모호하다. 하지만 머리 길이마저도 장단점이 있듯이 여행을 하며 느낀 장단점이 그 답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무래도 머리를 허리까지 기를 동안은 여행을 더 해야겠다.


콜마르는 사실 오늘 우리의 행선지인 브장송에 가는 길에 있기에 들렸는데, 만약 당일치기로 이곳에 왔다면 조금 아쉬웠을 것 같다.
콜마르의 지역 맥주. 맛보지는 못했지만 어딘가 로고가 포르투갈을 닮아 있다.
<90일 유럽자동차여행> 마흔번째 도시. 프랑스 콜마르(Col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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