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눈 내리는 마을, 샤모니
2019년 4월 24일
고등학교 때 내 취미는 월간 독서평설에 실린 '이 달의 그림'을 스크랩해서 나만의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2년 정도 구독했으니 약 24편의 그림을 모은 셈인데 모든 작품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몇 작품은 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샤갈이 그린 '나와 마을'이란 작품도 그 중 하나였다. 샤갈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강렬한 색 대비가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림 옆에는 이 그림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란 시도 소개되었었다. 시를 읽으며 3월에도 눈이 오는 마을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었다.
메제브(Mejeve) 대저택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후 우리는 드디어 몽블랑 산 밑자락에 있는 샤모니(Chamonix)로 이동했다. 4월의 샤모니는 낮에는 따스한 햇살을 느낄 수 있지만 해가 지면 쌀쌀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마을이었다. 겨울에는 스키로, 여름에는 산악스포츠로 유명한 샤모니는 몽블랑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머문 에어비앤비는 마을 중심가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거실과 부엌이 붙어있는 작은 아파트였지만 넓지 않은 공간 안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걸 잘 갖추어서 편리했다. 침대는 소파 위에서 내리는 특이한 구조였고, 빨래 건조대는 화장실 변기 위 공간을 활용한게 눈에 띄었다. 도심지역에 숙소를 만든다면 이 집의 공간활용을 성공사례로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숙소의 최대 장점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몽블랑 설산이었다.
샤모니에 도착한 둘째 날 우리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에귀 디 미디' 전망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에귀 디 미디'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 카는 해발 3,800미터에 위치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인데, 그만큼 가격이 사악하다. (1인당 9만원)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뷰가 예쁘다고 해서 아침 일찍 케이블카가 운행되는 시간에 맞춰 티켓을 사러 갔더니 오늘 산 위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빙하를 볼 수 있는 '몽땅베르 기차'을 타러 기차역으로 갔는데 이것마저 바람 때문에 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고도가 낮은 다른 전망대에 가겠다고 했더니 그마저도 바람 때문에 중단됐단다.
'에귀 디 미르'와 '몽땅베르' 행이 좌절된 우리는 숙소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삼시세끼 요리를 하며 잘 챙겨 먹었고, 가끔은 글을 썼고 영상도 편집했다. 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몽블랑과 아침, 저녁으로 굴뚝에서 피어나오는 연기들, 그리고 설산에 비친 햇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특히나 세차게 비가 내리다 창 밖으로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덧 날이 개고 일곱 가지 색깔이 선명한 무지개가 떠있는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렇게 샤모니에서의 2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날 새벽녘 눈이 떠졌다. 우연히 바라본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이미 내린 눈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초록색 나무들이 모두 하얀 솜털 옷을 입고 있는 듯 보였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은 따스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샤갈이 보았던 3월에 내리는 눈이 이런 느낌은 아니었을까. 전망대에 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마음이 새벽녘 내리는 눈을 보며 이내 채워졌다. 나에게 샤모니는 4월의 눈 내리는 마을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