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9
여행기간 : 2013.12.23 - 12.31
작성일 : 2016.10.12
동행 : 대학 한의학 교수 및 대학교 직원, 스님, 자원봉사자들
여행컨셉 : 영상 촬영 출장
새로 얻은 숙소는 세라성원에서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그 전에는 차로 40분 정도 움직여야 했는데, 여기선 2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2층에 자리한 숙소에서 눈을 뜨고 나가봤더니 마치 열대 우림 속에 있는 듯.
더구나 풀장도 있었다.
열대라 하더라도 12월 말. 아침 기온은 선선한 편이었다. 그래서?
수영복과 수경은 여행이 아니라도 내 상비 목록 1호이다. 풀이 있고 시간이 있는데 약간 춥다는 건 대수로운 변수가 아니지 않나?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참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식당 앞에 시체놀이 삼매경인 저 개. 가까이 가보니 숨은 쉬더라고. 근데 고개드는 것도 귀찮은 지 눈만 굴려서 나를 본다. 확 그냥^^.
인도에선 개들도 투명인간과 비슷한 취급을 당한다. 누구 하나 관심 갖는 사람이 없다. 윤회를 믿어서 그런가? 축생 중에서도 죄 많은 이들이 개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런 취급 받을 만한 전생을 살았으니, 정말 개 취급 당해도 싸다는 식이다. 그나마 이렇게 주인이 있는 개는 나은 편이고 길거리의 개들은 온갖 질병들을 달고 있는 게 보이고, 그걸 옮기고 있는데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가이드로부터 처음 받은 지시사항은,
인도에서는 절대 길에 돌아다니는 개를 만지지 말라는 거 였다.
새로운 숙소지만, 음식은 똑같았다. 어... 똑같았는지는 모르겠고, 향이 같았다. 고수인지 뭔지 참 적응이 잘 안되더라구.
덕분에 평생 먹을 계란 후라이며, 베이컨 정말 매일 아침 잔뜩 먹는 생활의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첫째날의 충격에서는 조금 벗어나서 겁없이 커리도 한 두 숫갈 퍼와서 먹기도 해 보니 다행인거지만.
그렇게 서둘러 챙겨서 다시 세라성원으로 향했다.
이제 우리 캠프는 소문이 날 대로 났나보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 단아하게 생긴 아줌마는 티벳에서 왔단다. 여기까지 오는데 보름이 더 걸렸단다. 대단한 분들이다. 가족 전체가 같이 왔다는데 어린 딸과 아들, 본인까지 냉병이 심한 상태였다.
진맥을 받고 등인지 어딘지 뜸을 놓아야 한다고 하니 저 표정이다. 곤란하다는...
실랑이가 좀 있었다. 절대 집 밖에서 옷을 벗을 수 없다는 것. 여성 봉사자들만 입실해서 하자는데도 안된다고... 결국 뜸 치료는 못 받고 처방전만 들고 나가셨다. 수줍은 많은 우리네 시골 누이같이 푸근한 인상이 지금도 어른 거린다.
통역하시는 스님이 증상과 관련한 모든 세세한 통역까지 능통하시지는 않아서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한 분 진료받는데 걸리는 시간도 그만큼 길었으니 오전 9시에 문을 연다고 해도 우리가 주로 도착하는 8시쯤이면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 왔냐고 물어보면 6시에 왔다고...
이 날은 비구니 스님 한 분과 근처에서 제일 번화한 쿠샬나가르까지 가야했다.
커피를 사기 위해서.
스님은 작년에도 달라이라마를 따라 이 곳에 와서, 커피를 사 본 경험이 있다고 했고 툭툭이를 내려서는 성큼성큼 앞장서 가셨다.
쿠살나가르의 중심 사거리까지는 포장도로 였는데, 한쪽 골목으로 들어오니 길이 엉망이었다.
비포장인데다가 하수관거 공사인지, 수도 공사인지 길 양쪽을 죄다 파헤쳐 놓은 상황.
가게들은 대부분 가정집을 겸하고 있는 듯 했다. 마치 우리 어릴 때처럼.
어릴 때 엄마가 했던 의상실 안쪽 방에서 네 식구가 오글오글 살았다. 그때 우리 동네 상가에서 장사하시는 부모님들은 가게 안에 있고 애들은 길에 모여 놀았다.
여기서도 애들이 공사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문 앞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그들 혹은 그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허락을 받고 촬영했다.
장난끼 넘치는 이 녀석들은 카메라를 들이밀자 모두 어색한 듯 표정도 굳고^^
커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벽면이나 눈 가는 어디라도 오래된 커피 진이 덕지덕지 붙은 근사한 빛깔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스님은 주인 아저씨와 꼼꼼하게 커피의 종류 등을 묻고 주문했다. 스님이 들고 다시 티벳으로 옮길 수 있는 최대한의 무게를 사셨던 것 같고, 나를 포함해서 내게 주문을 맡겼던 일행들의 커피량만해도 총 30kg이 넘었던 것 같다. 더블에이니 뭐니 주문도 복잡했고 그 종류에 따라 바디감이니 산도니 하는 것도 다 다르다는데... 뭔 소린지... 거기다가 우리 일행의 주문 사항도 복잡해서 누구는 원두 500g, 누구는 가루를 100g 등등 메모를 했으나 해독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다행이 스님이 알아서 잘 챙겨주셨다.
스님 법명을 어디 메모해 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님은 유학 오시기 전에 내원사에 계셨단다. 지율스님도 잘 알고 있고... 인연이란 참...
우리가 갑자기 대량의 커피를 사는 바람에 로스팅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분쇄기도 구경할 수 있었다. 콩값과 로스팅 값은 받지만 분쇄는 무료 서비스.
그래서 얼마냐구? 커피값이 무려 100g당 170원 정도.
커피 맛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집에서 더치로만 내려 먹을 거라서 커피의 질과 상관없이 10kg을 사버렸다. 그래봐야 우리나라에서 500g정도 사는 가격이니까.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다 보니, 카페인이 상대적으로 덜 들어간 더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근데 너무 비싸. 하여 간단한 더치 플라스크를 구매해서 집에서 내려 먹고 있었다.
근데 내 무딘 미각이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더치 커피로 유명한 예가체프 등 여러 종류의 커피콩으로 내려봐도, 맛은 거기가 거기였다. 커피 마스터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더치는 어떤 콩을 써도 맛이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샀던 콩들에는 로브스터 종도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집에 와서 주위에 나눠주고도 한 가득이었던 커피를 몇 달간 내려 먹어봤지만, 그냥 더치 맛이더라구.
일하러 나와도 외국에 나갔다 오면, 주위에 조그만 거라도 하나 선물을 사가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데, 스님 덕에 커피 팍팍 나눠주는 대인배가 될 수 있었다는...
커피를 사고 오후 늦게 도착한 세라성원. 인파는 그대로렸다.
더구나 이 날은 세라성원에서 의료봉사하는 마지막 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캠프를 열어야 했다.
이제는 촬영이고 뭐고 감당하기 힘든 환자들을 위해 모두가 전면 투입되어야 했다. 내겐 간단한 인적사항이나 수기로 진찰 전에 필요한 사항을 기록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한 쪽 어깨에는 카메라를 메고, 또 손으로는 통역하는 스님이 불러주시는 바를 열심히 적고...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를 마치고 캠프를 정리하는데 티벳 행정부에 계신다는 스님들이 몇 분 방문하셨다. 일행들에게 티벳 정부를 대신해서 감사의 표시로 축복을 상징하는 저 흰 천과 티벳 향불을 선물했다. 덕분에 나도 묻어가는... 흰 천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집에 향불은 반 정도 남아있다. 우리 향처럼 얇게 굳힌 것이 아니라 얇은 볼펜 정도 굵기의 향이다. 향이 정말 진했다.
의료봉사와 달라이라마를 친견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은 했던 일정이었다.
한 번의 의료봉사가 얼마나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의 주관적인 감상일 수도 있다. 단 한번도 의사의 진료를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분들이 더 많았고, 몸의 질병을 약간의 불편 정도로 감수하고 살아가는 저 순박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주 큰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나 평온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이 끝없이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중요한 교훈도 새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내 마음속에선 행복의 요소로, 국가가 가지는 의미가 더 약해졌다. 민족과 국가를 동일 시하는 거로는 둘째라면 서러울 티벳인들의 행복지수가 우리의 그것에 못하진 않을테니.
우리도 이젠 민족과 국가를 동일 시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민족국가가 되어 가고 있고, 민족과 국가는 애초에 동일하지도 않다는 걸 인정해야만 할 때도 되었다.
무조건적인 애국주의나 국가와 나를 동일시 하도록 교육하는 얼척없는 박정희식 교육관도 좀 버리고 더불어 무조건적인 애족이나 단일민족의 순수성에 대한 말도 안되는 자부심 따위도 좀 공교육 과정에서 걷어내었으면 좋겠다.
굳이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다면 한글이라는 최고의 문자, 소리 체계를 공유하는 언어공동체가 남아있지 않은가. 언어가 우리의 심성과 사고체계에 주는 영향력이란... 핏줄이 포괄하는 영역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언어가 아닐까?
남북이 굳이 통일을 해야하는지도 따져보고 싶다.
같은 민족이라고 꼭 단일 국가체계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그리고 민족의 구분 범주도 애매하고. 원래 하나였기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당위성이 좀 떨어지지 않나? 로마제국, 몽고제국으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잖은가? 일본의 위대한 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대로 거대하지만 포용력이 높은 "제국"이 가장 이상적인 지구상의 정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규모의 경제나 윈윈하기 위한 계산상 통일이 지금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건 국가체계의 통일 말고도 다른 수많은 방법론이 존재하는 거고.
분단의 찌꺼기를 빨아먹고 사는 인간쓰레기들, 분단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우리 공동체를, 또 나와 내 가족을 수탈하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의 부당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그랬고.
같은 언어를 쓰기에 공동체를 구성할 조건은 좋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전혀 다른 사회화(공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고방식을 강요받아 온 사람들에게 단일 공동체로의 삶을 강제하는 게 행복일까?
이상의 논거를 정리해 보면...
"분단을 극복하면 좋겠다. 근데 통일을 꼭 이루어야 할까?"가 된다.
그럼 분단을 극복하면서 굳이 통일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되나. 서로 적대적이지 않은 이웃 국가로 확고하게 자리잡으면 되지 않을까?
국제사회에서 영국은 유럽에 속하지만 미국편을 들 때가 많은 것 처럼. 남과 북이 서로 가장 호혜적인 언어공동체로 살면 되지 않을까 말이다.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남북의 통일을 정말 절절히 원하는, 그것이 가장 큰 꿈인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일본의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이 절절히 열망하는 통일 조국은 과연 뭘까? 호혜로 똘똘 뭉친 친한 이웃 국가면 안될까? 그들 앞에서는 이런 내색을 못했다. 통일 이외 남북의 최종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반통일세력"이 되는 분위기에서야...
나라 잃은 백성의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