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31
여행기간 : 2013.12.23 - 12.31
작성일 : 2016.10.12
동행 : 대학 한의학 교수 및 대학교 직원, 스님, 자원봉사자들
여행컨셉 : 영상 촬영 출장
다시 뉴델리.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다...기에는 워낙 델리에선 하룻밤 잠만 자고 바로 이동을 하기도 했고, 불과 일주일이지만 인도 남부쪽에서 마치 한 달 정도 지내다 온 것 같아서 그냥 낯선 곳에 온 기분만 들었다.
분명 벵갈로르로 이동하면서 지났을 델리 공항 내 벽 장식도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뉴델리의 교통 정체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면서 신호대기 중이었던 것 같다.고가도로 아래에서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의 남녀노소(풍선은 그녀가 팔려고 들고 있는 것 같았다)가 있는 고가 아래로 회색 고급 세단이 한 대 들어와서는 정차했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고 나온 저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는 기사가 트렁크에서 꺼낸 모포를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가이드인 샤시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저 할아버지가 빈민들이 주로 모여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담요를 나눠주고 있단다.
모두들 하나씩 챙겨받고 있었다. 쉽게 정리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인 독지가가 온정을 베푸는 훈훈한 장면으로도 읽혔고, 초파일이면 멀쩡한 민물 거북을 사서는 바닷가에서 방생이라며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민물거북은 짠 바닷물에서 버둥거리다가 죽는다. 부산 기장군 용궁사 앞 바닷속에는 그렇게 죽어 껍데기만 있는 거북의 사채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은 저 모습을 그렇게 미담으로 해설해 주지 않는 샤시의 야릇한 설명도 한 몫 했다. 그는 저런 행위가 저 사람들의 자립심을 오히려 망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저 노인이 모포를 구매하는 비용은 본인에게는 껌값이라는 등...
정답을, 최소 오답이라도 자신있게 내릴 수 없는, 난 그저 잠시 스치는 이방인일뿐이었다.
뉴델리에서도 툭툭이가 참 많다. 그것도 특정 회사에 소속된 기업형 툭툭이가 많았던 것 같다.
인디아 게이트
시내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방사형으로 도로의 분기점이 되기도 하는 "인디아 게이트"를 중심으로 로타리를 따라 빙 둘러서 스쳤다. 사람들이 무지 많았다. 게이트를 둘러싼 넓은 부지의 잔디밭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경기장들도 몇 개가 들어서 있었다. 뉴델리의 랜드마크구나 하는 정도.
뉴델리에는 풍선 파는 친구들이 많았다.
왜지? 가볍고 마진이 좋아서? 우리네 유원지 근처에 가면 끈에 달린 둥둥 뜬 은박의 티라노사우르스, 뽀통령은 없었다. 그냥 좀 큰 고무 풍선이었다.
힌두신은 거리 곳곳에 심심찮게 관찰되고.
라즈갓(간디의 화장터)
시내 도로를 아주아주 느릿하게 통과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라즈갓". 바로 간디의 화장터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 유학도 다녀오고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세계적인 평화주의자 간디.
간디 평전을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세세한 기억은 지워졌지만, 한창 데모하던 대학시절에 받았던 느낌은 생생하다.
"과연 이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자국 내에서도 비폭력에 대한 찬반 양론이 뜨거웠으나, 그를 부정하거나 매도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명분 높은 요구라도 테러에 기댄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최근의 독립 혹은 분리 운동은 찬반양론 정도로 끝나지 않고 수십만의 난민과 무고한 사상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가 주장한 방법론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나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유린하는 것이 정당화 되거나 권장되는 방식은 분명 아니다.
예전 노무현정부 시절,
내가 노사모를 탈퇴 했던 계기는 이라크 파병이었다.
명분이 뚜렷한 전쟁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만, 우리 군대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과의 경제적 협상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결정이라는 주장으로 강행 했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어떤 것도 감수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난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나와 잠시 설전을 벌였던 선배들(이 중에는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분도 있었다)은 다른 사람의 피와 우리 국민의 번영을 교환해야만 하는 더럽지만 꼭 필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직위가 대통령의 고통이라고들 했다.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의 피와 맞바꾼 번영을 거부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대통령이었으면 했다. 우리의 경제적 번영이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그들의 피와 함께 우리의 자긍심도 큰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는 게 그 결정의 대가로 보였다.
비록 적의 타격을 위한 파병이 아니라 의료진들의 파병이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국가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쟁에 그들의 이익을 돕고 콩고물을 얻겠다는, 최소한 밉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 이건 내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목적 달성을 위한 저속한 방법에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그런 암묵적 동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위정 세력들이 한 통속이 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비루한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간디의 방식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목적 달성을 위한 폭력(테러같은 직접 폭력 말고도 남들의 폭력을 돕거나 빌붙는 것까지 포함해서)에도 동의할 수 없는... 이런 회색적 인간에게, 위대한 인류의 스승임에는 두말 할 수 없을 간디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이곳이 그렇게 관광지 주마간산하듯 쉽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저기 모인 인도 대학생처럼 보이는 친구들은 저곳에서 어떤 말들을 주고 받았을까?
주차장 쪽으로 가니 커다란 간디의 사진이 붙어 있고, 간디와 관련된 책들도 판매를 하고 있다.
간디의 정치사상적 후배들, 네루며 간디수상 가문은 지금도 인도의 정치적 지도자 역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샤시의 말이 인도인들의 정서를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모르지만,
"간디는 존경하지만 간디의 후예들은 그렇지 않다"로 요약되는 그의 논조가 혼자만의 심지는 아닐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아쉬웠다.
노통 이후, 친노 끼리 "내가 진정한 친노다"라며 부딪히기고 하고, 문이 대선에 도전하면서 친노가 주류가 되고 다시 비주류와 틈새가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과도 닮은 듯 해서 더욱 더 그랬나보다.
인도 국립박물관
경주 박물관에 몇 번을 갔었다. 연애할 때도 갔던 것 같고,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갔었다. 그러나 경주 박물관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던 건, 우연한 기회에 사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와 동행했을 때였다. 풍부한 지식이 어우러진 해설은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경험을 주었다. 박물관이라는 곳이 시간 아까운 고리타분한 곳이 아니라 정말 그 사회를 통시적으로 섭렵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샤시가 그렇게 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그래서 결국, 주마간산^^
부처님에 대한 것만 모아 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넓은 전체 박물관을 다 둘러볼 시간이 없었던 우리 일행은 그 방을 중심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몇몇을 빼고는 모두 불자들이었으까.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라도 대략 알고 있으니, 그 스토리를 저렇게 상아에 표현해 낸 것에 눈길이 갔다. 다만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거라고는 코끼리 상아에 저 정도의 정교한 조각을 해 낼 수 있는 집념과 장인의 의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조각 작품들은 과연 어떻게 만들었까하는 궁금증, 그리고
멋있긴 한데 실제 신고 다니기에는 너무 아프고 불편하지 않았을까 여겨지는 신발,
부처님의 진신사리라고 하는 우리 모든 일행이 계속해서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던 저 사리 부도에서 신기해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다라고 보면 된다.
여기선 부처도 힌두의 여러 신들 중 한 분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다른 신들이 태생이 신이었던 것에 반해, 실존했던 인간이 신의 반열에 이른 유일한 케이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교는 혁명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다른 여타 종교가 그렇듯이 중세 때의 가치관에서 출발해서 남녀차별이 극심하고 지금도 부처의 말씀이, 혹은 불경이 전해진 당시 시대적 한계를 쇄신치 못하고 교조적으로 그대로 복창하고 있지만(심지어 어느 나라에서는 비구니승이 인정되지 않는 곳도 있다 한다), 신에게 복종하고 하명받기만 해야하는 인간 숙명을 전제로 하는 기존 종교와는 달리,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깨닭기만 하면 누구나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해탈)는 가르침은 과히 종교 혁명이다. 그것도 스스로 맨 처음 싯타르타 본인께서 시범 케이스가 되어 증명까지 해 주었으니...
최근 푸른 눈의 수행자로 불리던 현각스님이 한국 불교의 기복신앙화나 형식주의에 일갈했던 사건은 여러가지 논쟁 거리를 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랜기간 한국에서 승려 생활을 해 오면서도 문화 다원주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문화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서 허송 세월을 보냈다는 시각에도 일부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제기한 문제 모두가 허튼 소리로 싸잡는 분위기에는 반대이다.
불교는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긴 하다. 윤회나 인연설 같은 것이 그럴텐데, 그런 것이야 두고라도 스스로 내면을 관찰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해탈의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정진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종교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나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유일신을 내세워서 천국과 지옥으로 겁박하는 서양 종교는 참 거북한데, 불교는 그렇지 않다.
애초 종교로써 번성하기 위한 재력과 권력을 가지기 힘든 교리를 가진 불교가, 최소한의 재력과 권력(국가가 공식 종교로 채택하고 억지로 백성들에게 주입, 권력 유지에 활용하던 때는 뭐 국가 권위와 재력이 받쳐주었으니 문제가 없었을테지만)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기복적 신앙화는 궁여지책이지 않았을까? 스님이면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류 종파의 원칙도 알고 보면 신도들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승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조치이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억측은 아니라고 생각되고...
혁명적 발상이 혁명적 유산으로 종국에는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는 간디나 부처, 어디 두 사례 뿐이랴.
길었던 여행은 이렇게 마감했다. 정말 인도를 갔다왔다고 하기에는...
어릴때부터 '0'이라는 숫자를 맨 처음 고안해 낸 놀라운 식견과 부처나 간디를 만들어 낸 삶의 토양 등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인도"라는 설레는 이름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왔노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여행이긴 했다.
최소한 갠지스강 정도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벵갈로르나 마이소르의 광활한 초지와 독특한 구릉들은 일부러라도 다시 가 볼 수 없는 곳이 아닐까? 남들과는 좀 다른 인도를 가슴에 담고 왔으니 그 또한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최소한 이 여행 동안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는 사람(달라이라마)도 보고, 죽은 부처(사리)까지 만나고 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