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9
여행기간 : 2025.06.29
작성일 : 2025.07.06
동행 : 바야
여행컨셉 : 여름 계곡 산행
잔치봉이라,
대청, 천왕, 재약… 불교색 짙긴 해도 뭔가 스토리가 있을 법한 이름들의 봉우리도 많건만 왠 잔치봉?
예전에 이 동네 거지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얻어다가 이곳에서 먹고 놀았다 해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잔치봉 입구의 나무 팻말에 적혀있다.
추가로 이런 글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마을 사람들에게서 뺏은(‘훔친’이라 표현했던 것 같기도) 음식으로 연명했다고…
“태백산맥”을 가슴 뜨겁게 읽었던 애독자로서, 전쟁의 잔혹성과는 별개로 신념에 충실하려 했던 인간 군상들의 시대를 일방적인 선악구도로만 평가하려는 생각을 모두가 보는 공식적인 팻말 문장으로 택한 이의 주관적 개입이 참…
잔치봉은 충분히 많은 사람이 잔치를 벌여도 족할 만큼 펑퍼짐한 거대 바위 봉오리긴 하다.
원래는 이 계절이면 등산은 쫑, 바다수영으로 전환할텐데, 늦에 배운 도둑질의 무서움이 뭔지 아주 잘 알려주고 계신, 함께 살아주시는 분이 몇 년 째 등산에 꽂히셔서 한 여름에도 더러 산에 오르고 있다.
그나마 계곡이 있어 좀 시원한 곳으로 가자고 선택한 곳이 천성산 미타암-비로봉-법수계곡 코스.
가다가 너무 더우면 미타암 계곡만 갔다가 돌아오자고는 했지만 정상을 찍지 않고 그냥 내려오실 리 만무하다는 정도는 각오하고 집을 나섰다.
미타암 코앞까지 뽀송뽀송한 시멘트길이 깔린 걸 알았지만, 주말에 산쟁이들이 계곡이 있는 이곳으로 몰릴 거라 짐작하고는 500미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도로옆 숲길로 올랐다. 정작 미타암 코앞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많더라. 산쟁이들도 원래 이런 계절에는 시즌 오프라는 거. 그래도 오르는 동안의 편백숲은 제법 시원했다.
미타암은 11시20분부터 매일 공양을 하는데, 불자도 아니면서 먹기가 좀 송구스럽다는 생각과 달리, 도착하자마자 발이 알아서 공양간부터 들어간다. (참고로 절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미타암 대웅전의 단청과 지붕은 작품이다.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면 충분히 감상부터 하시길)
비빔밥의 나물들도 맛있었지만, 특히 매우면서 고소한 고추장이 일품. 실은 먹을 거라고는 비상용 스틱설탕과 꿀 조금 뿐. 점심은 애초에 없었다. 미필적 고의? 밥은 절에서 해결하겠다는 확정적 고의라고 봐야…
그래도 여름 배낭치고는 무거웠다. 작은 병이었지만 물을 4통이나 넣었거든. 같이 살아 주시는 분은 늘 그렇듯 지 몸 하나 달랑 들고 오셨고. (막판에는 물이 모자라서 쪼개 먹는 전우애를 발휘해야 했다. 그랬다, 역시 부부는 의리로 산다더니…)
공양간을 나올 때 보니 불전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린 그 불전함을 못 본 척하고 나와서는 대웅전과 굴법전에서 절을 한 뒤, 무전취식의 죄책감을 면할 정도만 각각 지폐를 불전함에 밀어 넣었다. 불자는 아니지만 등산하며 만나는 산사에서 꼭 절을 하게 되는 건, 모든 선인들의 가피, 아니 우주의 기운이라도 모으고 싶은 수험생 부모인지라…
굴법전의 동굴 속 부처님은 무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단다. 미타암을 간다면 굴법전에 꼭 들르라고 하고 싶다, 특히 여름엔. 말도 못하게 시원하다!
미타암은 절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고 들었는데 별로 그런 느낌이 없었다. 절 건물 사이를 연결한 아슬아슬한 길이 실은 절벽 바로 옆인데, 한창 푸르른 활엽수 잎들에 가려 전혀 아슬아슬하지 않았던 것. 잎이 다 떨어진 계절에 방문하면 중국의 화산파 본산에 온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가능하단다.
등산로는 굴법전 반대방향 끝으로 가야한다.
물이 풍부한 천성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원한 계곡을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오른다. 하필 비로봉으로 가는 쉬운 길이 공사중이라 통제되고 있었다. 폴리스라인 같은 색비닐로 막아놨다. 하는 수 없이 원적봉, 잔치봉 코스로 방향을 꺾었다. (그냥 라인을 넘어서 갔어야 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잔치봉에서 비로봉까지 가려면 중간에 깊은 계곡을 지나야 하는데, 겨우 올렸던 고도가 무색하게 계곡까지 한참을 내려갔다가 계곡을 건너 다시 올라간다.
그럴 수도 있다, 산이 원래 그렇지 뭐.
하지만,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길이 너무 희미했다. 계곡 물길을 수직으로 건너서 바로 길이 있으면 또 좀 괜찮은데, 살짝 대각선이거나 계곡을 따라 좀 이동해야 길이 이어진다면, 대략 난감하다. 계곡까지 내려가는 중간에도 길을 한 번 잃었고, 계곡 건너면서 또 한 번. 평소 다니는 등산객이 많은 코스는 동호회 이름이 적힌 띠지를 나뭇가지에 붙여서 표시를 해 놓은데 이런 것도 안 보인다면, 길이 아닌 곳에 있거나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산에서는 몇 달만 발길이 뜸해도 길이 사라진다. 인간의 답압이 참 무서운지라…)에 있다는 뜻.
첩첩 산중에 카카오맵 연결은 터무니 없는 소리고, 다운받은 오프라인 지도를 보고 갔지만 GPS 오차는 사실 감으로다가 때려 맞춰야 한다. 이런 희미한 산길을 서부영화에나 나올 법한 노련한 인디언에 빙의해서 찾아 가더라도 1m 오차로도 길 잃기 십상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는 거.
더러 혼산일 때, 길이 없어도 방향만 잡고 나뭇가지에 긇히거나 말거나 오래된 낙엽더미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거나 말거나 일단 길을 만날 때까지 노빠꾸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같이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분을 모시고 가는데 그럴수야… 하하하, 결국 부부는 여기저기 긇히고 여러번 푹푹 빠져야만 했다.
그렇게 길인 듯 아닌 듯한, 넘어지기 일쑤의 난코스를 올라 드디어 비로봉에 도착.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여보, 내려갈 때는 다른 길로 갈 거지?”
하, 늦게 배운 도둑질이 참… 곧 죽어도, 비록 원점회귀를 하더라도, 같이 사는 분이 입문하신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왔던 길 따위를 다시 되짚어 가는 건 또 금기시하는, 산을 아주 제대로 배우신 분 되시겠다.
“당연하지. 나를 따르세”
십 수년 전, 촬영을 위해 비로봉에서 법수계곡으로 내려왔던 기억을 더듬어 그렇게 법수원 코스로 하산길을 잡았다. 법수계곡을 끝까지 가면 소주동으로 내려가 버리니까, 계곡을 타고 가다가 법수원에서 계곡을 건넌 다음, 급 선회하면 미타암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금까지의 긇힘과 엎어짐과 푹푹 빠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산을 다 내려가면 도장찍자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렸다는.
이태 전, 둘이서 설악산 오색에서 백담사 코스를 16시간 트래킹 한 적이 있다. 막판에 실수로 15분 정도 알바를 뛰고 (엉뚱한 길로 가서 다시 돌아오는 행위를 이르는 전문용어) 난 후, ‘어 이 길 아니네’ 라는 말에 정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뚝뚝 떨어지던 기억이… 이 분과의 산행은 각별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법수계곡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가 있는 법수원 근처에 들어서니 ‘사유지 통행금지’라 적힌 팻말이 있었다. 사찰 인심 좀 야박하다는 생각도 잠시, 지척에 미타암을 두고 다시 비로봉으로 가긴 이미 너무 많이 왔고 지쳤고 물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래 못 본 척 하자…
‘사유지’로 들어섰다. 너덜 바위구간이라 하체에 힘을 많이 주면서 급경사를 내려왔다. 계곡의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다리도 보였다. 근데 다리로 접근하는 계곡 양쪽 모두를 막아뒀다. 약간의 틈이라도 있을 만한 곳은 사릿대로 봉쇄까지.
계곡은 상당히 깊고 계곡으로 접근하는 길도 너무 가팔랐다. 어떻게 접근에 성공해도 수량이 상당하고 물살이 빨랐다. 여차저차 건넌다 해도 물 건너는 절벽이었다.
표를 안 내려고 노력은 했지만 함께 한 세월이 20년인데, 이미 ‘나 상당히 당황했고, 방법은 모르겠고, 당신한테 들킬까봐 안되는 표정관리 중이야’라고 얼굴로 말하고 있었나보다.
“이제 어떡해?”
건너기 쉬운 곳이 있겠거니 하고 계곡을 따라 좀 더 내려가 보는데, 마침 계곡 근처에서 과일을 들며 앉아서 쉬고 계신 부부가 보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길을 물으니 다시 되짚어 오르다 보면 법수원 지나자마자, 찾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희미한 길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가면 다리 한참 위에서 계곡을 건널 수 있을 거라고…
다시 인디언 빙의를 시전하니, 생각보다 그 희미한 길의 들머리는 쉽게 발견했다. 하지만 이내 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렇게 방향만 정해서 없는 길로 가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산넘고 물건너 나무 사이를 헤집고 미끄러지는 급경사를 클라이밍하든 두사람이 밀어주고 땡겨주고 하면서… 한 시간의 사투 끝에 간신히 오솔길 하나를 만났다. 정말 오솔길이지만, 그 희미하게게 길 같으면서 길 아니었던 길에 비하면 8차원 고속도로 같았다. 둘러보니 한시간 정도 헤맨 결과가 예의 그 법수원 다리 반대편이었다. 건너편까지 채 50m나 되려나? 그 길을 둘러오는데 한 시간 이상을…
'사정은 모르지만 예전엔 안그랬는데, 법수원 인심이 진짜 좀 그렇네' 십 수년 전엔 분명히 법수원에서 다리를 건넜건만... 내 살자고 남탓을 과장 해야만 하는 이 비루함이란…
다 저녁에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평소 듣기 좋은 톤으로 잘 재잘대던 그분은, 내내 과묵했다. 불행중 다행인 건,
따로 도장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다.
오늘의 교훈,
1. 여름 산에 갈 때면 물은 과할 정도로 챙기자.
2.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일 수도 있다.
3. 같이 살아주고 계신 분을 보고 있자면, 내가 전생에 거북선에서 노를 저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