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14
여행기간 : 2014.2.14 - 2.15
작성일 : 2014.2.20
동행 : 사무실 후배들과
여행컨셉 : 백패킹
#1. 산행의 즐거움과 우연한 경험들의 만남
두 종류의 여행. 혼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혼자하는 여행은 자기와 만나기 위해서 떠난다. 목표를 달성해서 만난다면야 너무 좋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또 떠난다.
둘 이상이면 그건 말 그대로 MT다. 멤버들의 화합.
근데 재밌는 건, 화합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 가끔은 다투기도 하고, 서로 묵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화해하거나 내가 생각지도 못한 느낌이나 시각을 환기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느냐 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통의 시간에 각별한 감흥을 공감할 수 있는 특수한 여행지는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화합과 공감의 에너지 장을 형성해 주기도 한다. 물론 뜻하지도 않았는데, 그 속에서 자기와 덜컥 대면해 버리기도 하고.
실상 혼자든, 여럿이 가든 여행의 본질은 ‘나’와 만나서 겸손해지는 것이고, ‘너’와도 만나서 각별해지는 것이 아닐까?
여럿이 가는 여행이 혼자하는 여행과 같을 순 없지만, ‘밖’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자신’도 만날 수 있는 여행의 본질에서 벗어난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지리산일진데, 이게 가능한 특별한 곳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불과 한 달 전에 다녀왔지만, 다시금 잊을 수 없는 어떤 순간을 만난다는 설렘의 량이 줄어들진 않았다.
같이 가는 멤버가 달라지면, 같은 장소도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되는 거니까.
그 전에 나의 위치와 자세도 다르게 되고.
애초에 8명이 준비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5명의 정예 멤버가 떠났다. 출발 전날 사무실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부러뜨린 경우까지 '우여곡절'이라 부르기 손색없는 일들이 있었다.
5인.
너무 적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알맞은 숫자 같다. 지구를 지키며 어딘가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새 무리 형제도 독수리를 필두로 5명이었구나.^^
우리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사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각자 고민하는 지점이 상이하고, 자라 온 환경이 다르고, 주된 관심과 처한 환경에 대한 대응 태도와 방법도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한 날 한 시에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기적같은 일이다.
실제 우리들의 지리산행도 갖은 곡절 끝에 성사 되었다. 이건 연인과의 여행이든 자식과의 여행이든 마찬가지리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코뮨 상태라고 스스로 아무리 자기암시를 해도 개체라는 경계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으니...
심지어 산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백두대간 종주를 지리산에서 마무리 하는 날이라던 젊은 연인, 8시간 내내 코를 골아서 산장사람 모두에게 밤새 공분을 모았던 아저씨, 산꾼에 근접한 느낌을 주던 로타리산장 내 옆자리 청년, 버너 코펠 없이 햇반과 라면만 달랑 들고왔던 3인조 대학생들). 이들은 다양한 삶의 일상에서 벗어나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밖'을 보기 위해서 어느 귀퉁이까지 온 사람들이다.
여행은 이런 사람들과 동질한 시공간적 찰라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여행이라도 설레고 새롭고 특별하다.
인생의 다양함이 만나는 장.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에 나설 때마다 겸손해진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나 유흥이다(관광이나 유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이것도 필요한 거니까).
인간 면면의 다양함에서 좀 더 나가서, 생명의 다양함에 까지 생각이 이르면 내가 속한 종의 입장에서도 겸손한 마음이 생긴다. 모든 여행자는 생태주의자가 되기 마련이다. 여행에서 인본주의는 점점 옅어져 간다. 특히 이런 대자연의 속살에 안겨있으면 더욱 더.
내 인생의 일상이 여행과 같다면… 아마도 직업적인 여행가들은 이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사람들일테지.
꼭 여행가가 아니라도 삶의 순간순간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생명과 상황을 시공간의 공통분모 속에서의 조우라고 여긴다면 얼마나 내 삶이 평화로와질까?
여행은 초점없는 흐릿한 눈빛이, 여태 지루하게만 보였던 내 인생이, 다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생명체와의 조우를 기대하는 살아 숨쉬는 교뮨적 생명체로 거듭나게 해 준다. 효과가 그리 길지 않은 우리같은 범인들은 그래서 또 다음 여행을 준비하지만.
후배들은 매일 영상이나 영화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심신 미약 상태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야 주말마다 해운대나 광안리에서 수영도 하고, 몸 상태 괜찮으면 출퇴근도 자전거로 하면서(집을 나서서 지하철 2호선을 이용 종점부터 쭉 타고 오면 사무실까지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반해 자전거를 타면 1시간 15분 정도면 도착한다. 물론 출근 후 에너지 방전으로 줄인 25분 이상의 휴식을 요구하지만...) 심신미약을 살짝 컨트롤 해 주는 삶을 살고 있다.
얘들아, 산에 함 갈래?
라는 말에 다들 그냥 '예, 좋쵸.' 라고 영혼없이 응수해주면 어쩌나 했는데, 너도나도 절실하게 가고 싶어했다. 이거 말 잘못했나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딱 한달 전 다녀온 중산리~천왕봉~장터목 코스.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어 올 수도 있는 코스라 여겨져서 후배들에게 제안했다.
날이 너무 좋았다.
예년 날씨보다 훨씬 따뜻했다. 이상하게 내가 산행을 하면 날씨가 좋아진다.
저번 지리산행도 날이 너무 따뜻했다. 가족과 갔던 한라산도 눈들이 다 녹을까봐 걱정했을 정도니…
중학생 시절 내 별명 중 하나는 ‘에스테반’이었다. 어릴 때 ‘나디아’라고 흥행했던 MBC의 어린이 애니 시리즈 바로 직전에 ‘태양소년 에스테반’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다. 세상을 구원할 운명을 타고난 좀 나약하고 어눌한 소년. 그는 늘 햇볕을 몰고 다닌다. 나처럼.
산행에 날씨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지리산행에 처음으로 나선다는 놈들에게는, 아니 그 놈들 끌고 온 내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중산리 출발점의 해발고도가 670미터라서 고도로는 1,250미터 정도만 오르면 된다. 물론 심신미약의 후배들에겐 이것도 쉬운 건 아닐테지만. 좀 더 낮은 설악산은 해안 옆에 있어서 출발 지점이 낮다. 험하기야 둘째라면 서러운 지리산이지만, 출발 고도에서는 이점이 있다.
그래도 이맘때 천왕봉에서 맞는 일출시의 기온은 영하 15도 정도나 되니, 누구 말대로 “겨울 지리산? 알프스라 보믄 된다."
산행준비하면서 하도 겁을 주기도 했고, 또 산행하면서도 입버릇처럼 ‘벗어’하면서 땀으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해서, 모두들 체온 관리는 잘 하면서 등산했다.
산이 깊어질수록 도시에서만 살면서 무뎌진 몸이 전혀 다른 경관과 공기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산이 대부분 그렇듯 초반에는 완만하다가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났다.
칼바위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다들 해맑은 표정에 재잘재잘. 하지만 칼바위에서 입었던 패딩과 외투를 벗어서 배낭에 쑤셔 넣고 부터는 일단 말수가 적어졌다.
그렇게 초반에 좀 힘들어 하던 놈들이 사점을 넘긴 이후로는 즐거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점은 참 신비로운 신체의 변화를 초래한다. 그 경계를 넘어서면 몸도 마음도 전혀 다른 경험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몸은 분명 같은 몸인데, 그 전의 몸과 ‘죽을 것 같은 고비의 순간’을 넘긴 이후의 몸은 전혀 다른 몸이 되어버린다.
망바위까지의 험한 산길에서 누군가 선곡한 노동요(?)는 중학교때 한창 듣던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하지만 음악적 취향에서 극명하게 세대 차이가 나는 후배들의 폰에서는 곧 낯선 전자음악 사운드가 튀어 나왔다. 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도 고요한 산에서는 제법 크게 들렸다.
로타리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산장지기는 음악을 틀고 다니는 것에 대해 과태료 부과까지 들먹이면서 경고를 했다. 사실 산에서는 크게 웃고 떠드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건데, 음악까지 틀다니(실은 나도 산에서 뿐만 아니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트레킹 코스에서 크게 음악을 트는 사람들이 짜증난다)... 힘들어 하는 놈들이 그나마 힘을 좀 낼 수 있는 방편이라 여기고 주의를 줄까하다가 말았는데, 결국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로타리 산장은 해발고도 1,335미터 정도에 있다.
산장 자체가 아담하고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가 없다. 천왕봉까지의 코스가 죽음의 코스라서 사람들이 꺼리기도 하고 예약제로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정해져 있어서, 등산시 고요함이 있다. 작은 산장 규모가 오히려 아기자기 한 맛이 있고, 정상까지의 고통이 정상에서 맛 보게 될 기분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 같아서 중산리코스는 늘 마음에 든다.
이맘때 산장 숙박을 신청하기위해서는 일찌감치 예약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우리도 산장 예약에 성공하기 위해서 원하는 날짜의 예약 접수 개시시간에 맞춰, 여러명이 첩보작전 펼치듯 카톡으로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동시 접속해서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원래 이 곳은 로타리클럽에서 세워서 운영해 왔던, 국립공원에서 몇 안되는 민간운영 대피소였다. 오랜 설득과 회유로 국립공원관리사무소의 직영으로 넘어 온 곳이란다.
대피소 샘은 이미 얼어버렸고, 대피소 바로 위, 법계사 삼층석탑 아래 샘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법계사에서 비구니 스님들을 만났다. 이제껏 비구 절로 알고 있었는데, 이 높은 곳 절에 계신 스님들이 비구니승이라니… 대단들 하시다.
법계사 샘은 함석으로 된 가로 50센티 정도의 뚜껑이 덮혀 있었다. 문을 여니까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정말 법계에나 있을 법한 물이 한 가득 고여있었다.
주위가 모두 얼음과 눈인데 어떻게 이렇게 전혀 얼지 않는 샘이 있을 수 있을까?
차디찬 물은 영점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아마 여름에도 그 온도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질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석간수가 다만 신비로운 조화로 보일 뿐. 약간 어설픈 함석 뚜껑으로도 그 물의 가치가 전혀 손상되어 보이지 않았다.
매 순간 작은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예민함도 몸과 함께 사점을 같이 넘긴 모양이다.
#2. 낭만의 지존
손에 손에 물을 떠다 들고 대피소로 내려오니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천지를 감싼다.
낮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주린 몸이 걸음을 재촉했고, 구워내기 바쁘게 입으로 아니 목으로 넘어갔다.
중산리 도착 전, 시천면에서 돼지삼겹살을 2.5킬로나 샀다. 5명이면 2킬로도 많다고 얘길했는데, 역시나… 반 정도 먹으니 배가 불러왔다.
밥도 한 솥 가득 해서는 결국 버너와 코펠도 없이 올라온 배고픈 청춘 3인조에게 남은 밥과 찌개를 줘버렸다. 근데 이 총각들은 무슨 배짱으로 취사도구 하나 없이 올라왔을까? 무모하니 젊음인가?^^
남은 돼지고기를 다시 지고 내일 산행할 생각에 다들 억지로 억지로 쑤셔넣었지만 중과부적. 결국 다음 날 머시마들은 반도 줄이지 못한 식량을 다시 배낭에 넣고 10시간을 걸어야만 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준비할 수 있는 요령은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가능한가보다.
어째 한 번 딱 맞게 준비했던 적이 없냐...
그나마 식사를 마치고 영하 10도나 되는 산장 앞마당으로 나와서 소주를 기울였다.
부어 놓은 술잔에 자연스레 살얼음이 낀 소주의 맛이란...
달빛 아래 운치 하나는 정말…
특히 맨 마지막에 후배 녀석 하나가 야심차게 내린 커피의 향과 맛, 더구나 보름달이 내려다보는 아래에서의 끽다의 흥취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낭만의 지존이라 칭할만 했다.
이 맛에 산에 온다는 쾌락주의 시각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지 않겠나?
우리 뒤로 천왕봉에 아슬하게 걸려 있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그리고 너무도 또렷하게 보이는 오리온자리의 적색거성 ‘헤켈테우스’의 붉은 일렁거림은 술자리의 격을 높이는데 충분조건이었다.
술이 좀 되었던 모양이다. 후배들한테 지구의 중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소라야 기껏 수소 정도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종류의 원소들이 지구상에 있다는 건, 결국 다른 행성과의 충돌이나 물질 교환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런 의미로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성분은 다 우주에서 도착한 것들이니 우리가 바로 우주인이라고... 우주인으로서 우주인답게 사고하자고...
술만 취하면 늘어놓는 객소리를 한참 지껄였다. 그나마 내가 바로 '어린왕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밤늦도록 노닐어도 9시.
이미 1시간 전에 대피소는 소등했고, 거나하게 마시고 찾아 들어간 침상의 내 자리엔 후끈한 공기와 코 고는 기차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5시간을 멀뚱하니 누워있어야 할 시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