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27~8.28
여행기간 : 2005. 08.26 - 08.28
작성일 : 2005.09.04
동행 : 인생의 절친
여행컨셉 : 무전여행에 가까운 백패킹
일주도로가 주로 해변에 임해 있지만, 아닌 곳도 더러 있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남양으로 가는 길과 태하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김. 트럭은 남양 방향으로 가야해서 그쯤에서 내려주신다.
바다를 향해서 완전히 벌린 채 마주하고 있는 다른 마을과는 달리 태하는 태하천이라는 꽤 넓은 하천이 해변으로 '수직의 발'처럼 뻗어있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형태다.
또한 바로 옆 대풍령의 절벽들도 마을, 하천을 따라 병풍처럼 나란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그 웅장한 병풍이라니...
위에서 보면 마을 한 줄, 태하천 한 줄, 마을 한 줄, 대풍령 한 줄.
태하는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우리는 바로 방파제까지 걸었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수평선에 낮게 드리운 구름 속으로 잠기려는 시간대.
우리는 울릉중학교 태하분교 운동장으로 갔다. 거기서 텐트를 치려는데 운동하던 아줌마들이(여기도 웰빙바람이 불어서 언젠가부터 저녁이면 동네 아짐들이 나와서 운동장을 돈다고 그러더라^^) 텐트 칠 자리로는 어디가 좋고, 어디는 모기가 있고... 참견들을 하신다.
순박한 사람들.
여기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건다.
'남북의 창'에서 이북 사람들 인터뷰를 할 때나 부산아시안게임 때 찾아 온 이북응원단원들이 짓궂게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농담조로 맞받아치는 모습이 연상된다. 기본적으로 동종에게 경계심이 없는 심리 상태랄까?
울릉도는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사람을 만나고 사귀기가 쉬운 고장이다. 그런 고장으로 쭉 남기를 바란다.
막 텐트를 치고 있는데 뒷짐을 진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중년 남자가 시부지기 다가왔다.
"저기.. 교사 옆 시멘트 위에 치시죠?"
학교 수위아저씨인가? 아직 방학일텐데?
몇 마디 주고 받다보니, 이 학교 선생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일단 말투가 좀 달랐다. 지금까지 만난 울릉도 사람들의 말투는 거의 부산사투리에 가까우면서도 약간 강원도 억양이 섞여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북에 속하지만 부산사투리?
오히려 관광객들이나 경북 사투리가 심하지 현지인들에게선 별로 들어볼 수 없었다. 의문형의 어미에서 "OO능교?" 라고 할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마치 부산사람들이 대거 이주라도 한 듯, 부산에서 온 우리에게 최소한 말씨에서는 퍽 익숙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지만 표준어에 가깝달까?
분명 외지 사람이고 차림새로 보나, 교사 옆의 자기 차 뒤에 텐트를 치라는 말 등으로 미루어 보나, 학교 선생님일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자기를 이 학교 국어선생님이라 소개하신다.
남덕순선생님!
"야, 저녁놀이 정말, 장관이네요~"
우리가 대화 도중 환호성을 지르자, 샘은
"저건 놀도 아닙니다. 어쩔 때는 하늘이 온통 피빛일 때도 있는데, 오늘은 약과구만."
정말 그런 피빛 놀을 보여줄 수 없음에 자존심이라도 다친 듯한 말투.ㅋㅋ
남샘의 조언을 듣기는 했으되, 교사 바로 앞에 있는 운동장 귀퉁이로 자리를 옮겼다. 수돗가도 교사 뒷편에 있었기에...
그날이 개학일이었단다. 샘도 본가인 김천에서 가족들과 보내다가 막 다시 울릉도로 오신 거고...
우리에게 대단히 친절하셨다. 저녁은, 학교 안 실험실에서 샘이 끓인 지게에 샘이 꺼내 온 반찬과 밥으로 해결했다. 그래놓고는 자신은 방금 식사를 하셨다고... 네? 하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염치고 뭐고 잊은 채 넙죽넙죽,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 치운다. 한창 먹을 나이였으니...
"고맙습니다."
"뭐, 이런 걸... 우리야 그냥 먹던 거에 수저 하나씩 더 놓으면 되는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주는 사람의 5배나 더 고마워하니, 이 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말고도 이렇게 노숙(?)을 자처하는 젊은이들에게 잘 대해 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선생님의 작은 친절도 올해엔 우리가 끝물이지 않았을까?
커피까지 대접을 받고 우리는 대략 또 울릉도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다.
꼭 대풍령으로 올라서 등대를 보고 가라는 말씀.
식사를 그렇게 해결하고 나니 시간이 좀 남는다. 어제보다는 훨씬 여유있는 저녁. 석양도 바라보고 천천히 우리의 시간을 즐겼다.
벌써 가을의 느낌이 나서일까? 우리는 일찌감치 긴팔 옷을 꺼내입고 가로등이 있어서 텐트를 치라고 했던 운동장 스텐드 위의 시멘트 바닥에 앉았다. 매점에 가서 사온 복숭아 통조림과 과자 부스러기를 두고, 당연히 조니워커와 함께~^^
별다른 얘긴 없었지만, 가눌 수 없는 벅찬 산천의 풍광 기행에 대한 자신과의 뒷풀이를 각각 즐겼달까?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렇게라도 되새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감흥으로 조금 과하게 먹었다는 게 좀...
그러는 사이에도 동네 아짐들은 훌라후프까지 들고 나와서 다들 인사도 나누고 이런 저런 얘기들도 하면서 파워워킹인가 하는 동작 삼매경 속으로... 이런 광경을 울릉도에서 보다니...
"이 집은 아저씨들 집인교?"
우리 텐트에 대해 뭔가 또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아줌마 한 분이 우리를 미소짓게 했다. 말한 분과 동행분들은 더 크게 웃으셨지만.
자리에 막 누웠을 때, 좀 취하신 듯한 다른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사 바로 뒤에 사택이 있어서 아마도 어디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돌아오신 듯. 운동장을 도는 마을 아짐들과 이런 저런 농담들이 오고갔다.
선생님과 학부형의 대화가 또 한 번 미소짓게 한다.
"맨날 말로만 친구고, 방학동안 어째 연락도 함 없었능교?"
"하하하, 그리 됐네요."
"이제 친구 안할란다. 원래 내가 나이도 많은데 누나라 카소."
"하하하"
5시 반. 어제보다는 덜 추웠던 걸까? 일요일이라서 그랬을까? 사위가 밝아져서야 일어났다.
취기가 살짝 남은 상태지만, 그래도 몸은 어제보다 훨씬 가볍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그렇게 많이 걷질 않았구나^^
그래도 추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추위로 인해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일어났어요?"
남샘께서 부르셨다.
"예"
"지금가면 오솔길하며 대풍령하며 딱 좋은데..."
실은 밤에 궁금해서 혼자 절벽으로 오르는 길을 물색하러 갔었는데, 실패하고 돌아왔던 차라 샘한테 길안내를 부탁했다. 간단하게 전해 듣고 'J'를 깨워서 텐트를 나섰다. 태하항은 태풍 "매미"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곳이라서 아직도 복구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닷가 여기저기에 대형 중장비들이 가득, 마음대로 부서진 골재와 시멘트 덩이들이 부서진 방파제 끝과 포구 안쪽에도 가득 쌓여 있다.
샘 말씀대로 그리 험하지도 멀지도 않은 오솔길은 산죽과 동백이 아늑하게 꾸며주고 있었다.
등대가 있는 관리소 마당을 가로질러서 가니 대풍감이라고 천연기념물 향나무 자생지라는 입간판이 나왔다.
이곳 향나무들은 험한 기후로 인해서 제대로 크질 못하고 다들 무슨 관목들처럼 땅딸막하게 땅에 붙어있다.
대풍령에서 바다로 난 땅 끝자락 바위 위에 큰 나무가 있는데, 멀어서 향나무인지 아닌지는...
두사람이 해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낯선 공간에서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모르는 이와의 조우라...
어디서 오신 분인지도 모르지만, 제법 연배 차이가 있는 사이임에도 자연을 소재 삼아 꽤 많은 수다를 떨었다.
마침 아침 해가 우리가 지나왔던 현포 너머 송곳산 쪽에서 고개를 내밀어 해무를 걷어낸다.
공기는 더 없이 맑고, 태양과 내 눈 사이에서 그나마 있던 수증기의 덩어리마저 걷히자, 그 사이엔 空만이 존재하는 듯. 눈 안에 있는 잡티 아니면 안경에 난 흠집들이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대풍령은 그 절벽 위의 언덕을 가리키는 말일테고 대풍감은 바로 우리가 서 있던 감상 포인트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거기서 바라보이는 해안쪽의 물은 한번도 실제 본 적도 없는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구나. ㅋㅋ
어느 태평양 섬 주위를 소개한 여행사의 사진에서 본 바로 그 물빛.
내려오니 남샘이 기다리고 계신다. 아침을 같이 들자셨다.
마늘, 파와 양파는 내가 다듬었다. 샘은 그것들과 김치에 통조림을 넣은 찌게를 끓이셨고, 'J'는 인스턴트 국거리 중에서 남은 육개장을 작은 양은냄비에 끓였다. 또 한 분 샘이 오신다고 했으나 아직 주무시는지 우리끼리 식사를 해야만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쌀과 반찬을 모두 두고 가기로 했다.
"어디다 둘까요?"
"저기 밑에"
실험실은 음악실, 미술실, 과학실, 가정실습실을 겸한 칠판까지 있는 곳이었는데, 여러 해부학 자료들이 있는 벽장 밑쪽에는 우리처럼 여기서 식사를 해결한 다른 젊은이들이 두고 간 쌀들이 가득 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밥먹고 사택 302호로 와서 샤워도 하고 그러고 가세요들."
실은 아까 등대를 갔다가 황토굴이라는 데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기가막힌 자연 풀장을 봐 놓았다.
당연히 이후 일정이나 도동항까지의 남은 거리 따위는 잊고, 물놀이를 하기로 결심. 그러고나서 샘과 식사를 한 참이라 샘한테 좀 무리한 부탁을 했지.
"샘, 수영을 좀 하고 나서 샤워를 해도 되겠습니까?"
위험해서 들어가면 안된다는 말씀에 잔잔하고 그리 깊지 않은 곳을 봐 뒀다고 안심을 시켰다.
샘도 거기라면 하시면서... 다시 황토굴 쪽으로 갔다.
기암절벽에 난 제법 큰 구멍 한 켠에 붉은 지층이 있는데, 예전 난을 피해 여기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그 흙으로 연명했단다. 그래서 먹어봤다. 이걸 어떻게... 그래도 색깔만은 이채로왔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낙원이라하면 떠오르는 풍경 중에나 있을 법한 곳.
바다로 임하고 있는 바위가 조금씩 패여서 넓은 터를 형성하고 있고, 위에서 바라 본 빛깔은 예의 그 에메랄드 유혹.
아무도 없는 그곳을 둘이서 독차지 하고는 반라 차림으로 멱질을 시작한다. 물이 너무 맑고 남해와 달리 그리 짜지 않아서 민물인지 짠물인지 구분도 잘 안된다.
무슨 해초들이 그렇게 많은지... 청각을 조금 땄다.
음... 실은 조금은 아니었다. 수건 한 장 뿐이라 거기에 담을 수 있는 정도만 땄지만 그래도 한 가득이었다.
나중에 집에 들고 가니 엄마는,
"구질구질 한 거, 다 버리고 배낭에 이거나 더 넣어오지."
볕에 말리면 금방 마르고 그러면 더 많이 배낭에 넣을 수 있었을텐데... 어쩌고 저쩌고...
안 가져 갔더라면 듣지 않았을 잔소리만 들었다. 울릉도 기념품이랍시고 사 갔던 호박 조청은 그에 비하면 그리 환대 받진 못했다는, 쩝.
물을 워낙 좋아해서 늘 수경을 상비하는 내가, 하필 저번에 우리 시골가서 잊어버린 이후에 새 수경을 두고 와버렸다. 그렇게 후회될 수가...
심지어 'J'는 근처 어디 수경 파는 집 없냐고 몇 번이나 궁시렁 궁시렁...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물고기 등, 바다 속 풍경을 못 보고 온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래 있지는 못했다. 아침이라 아직 물이 차가웠다. 덜덜 떨면서 청각을 넣어 말아쥔 수건을 들고 다시 학교 뒤 사택으로 갔다.
사택 욕실엔 온수까지 나왔다. 샘의 배려에 다시 속으로 감사하면서 샤워까지 하고 아쉬운 작별.
울릉도 버스는 주로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가지만 자주 있지는 않다. 비수기에는 한시간이나 한시간 반 간격이고 점심시간이 끼면 두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11시 40분 버스를 타고 우리는 도동까지 직행.
중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없진 않았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일요일에는 돌아가는 관광객들과 섬사람들로 인해서 자리가 없을 수도 있는데... 예약 안했어요?"
남샘의 말씀에 덜컥 겁이나서 표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