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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 Jul 30. 2017

'바람타고' 어때?

작성일 : 2016.12.7






영화하고 싶어


대학시절 통성명 정도 하고, 가끔 마주치면 목례만 하던 동기가 지금의 절친 'J'다.

난 풍물패 동아리에 있었고(지금 대학생들은 상상도 안되겠지만, '내 전공은 풍물이었다.' 이건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과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니 뭐... 학과 수업은 후배들의 족보로 연명했다고 봐야^^) 졸업 후 전혀 취직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전공 공부를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IMF세대라 불리던 우리들은 다들 불안하게 졸업을 맞았지만, 난 별로 그런 것도 없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르지만...

동기 중에는 졸업 후에도 풍물을 계속하자는 녀석이 있었다(지금은 잘 나가는 사부님이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말했듯, 대학생치고는 우리 학교의 기술적 수준은 상당했다. 전국적으로는 '김덕수'라는 거인이 있긴 했지만, 워낙 풍물이라는 전통 예술이 지역성을 바탕에 두어야만 가치가 있는 거라서 천하통일, 유아독존의 개념과는 좀 멀다 할 수있고, 그래서 나름 적성만 맞다면 영 엉뚱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판소리의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가 일반인들이 들었을 때에도 어느 정도는 구분이 가능한 것처럼 풍물도 지역색이 많이 묻어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서편제의 대중성이 다른 것들에 반해 높은 것과 달리 서울 경기 풍물이 다른 지역의 악에 비해 더 대중적이나 유행한다 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덕수 아재가 각지의 악을 서울 경기 풍물('웃다리'라 부른다)의 타법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애초에 지역적 특성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다는 반발 혹은 더욱 지역성을 강조할 수 있는 분야들이 터져나오도록 유도한 측면도 있었다. 당시 풍물은 웃다리와 함께 호남의 좌도, 우도농악(지리산을 기준으로 서울서 본 좌우에 따라 구분)외에는 딱히 명칭도 없었다. 경상도 풍물은 갓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그래서 경상도 풍물을 본격적으로 파 보자는 인생 목표도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판단일 수 있었다. 난 거절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일을 밥벌어 먹는 일로 하면 싫증이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이런 판단에는 1993년 설날, 평소 좋아하던 고 박동진 할배나 고 김소희 할매의 소리를 직접 듣기위해 부산KBS 홀에 공연을 보러 가서, 박동진 할배가 하신 말씀이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광대는 남들이 간만에 가족들 만나서 즐길 때, 그때 가족들과 헤어져서 돌아다녀야 해. 그라고 울고 싶을 때도 웃어야 하고, 아파도 웃어야 하제~.

'그렇구나. 광대의 삶이란 그렇게 즐거울 수만은 없는 거구나.
기실 광대는 예술가의 중세 표현이 아니겠나? 풍각쟁이라며 어른들이 그렇게 예술을 못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거구나.' 
철없던 시절, 광대 아니라 노숙을 해도 상관없지만, 웃고 싶지 않을 때 웃는 건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창 생태주의, 노마디즘(지금은 이런 말로 쓰고 있지만, 당시 내가 고민하던 삶의 양식을 표현해 줄 말도 없던 시절이다), 혹은 아나키즘 같은 것들에 심취해 있던 때이기도 했다. 여기에 천문학만 더해지면 그야말로 백수건달 완결판일텐데, 다행인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생겨서^^.

그러다 우연히 'J'를 다시 만났다.
딱히 뭘 하고 싶다는 게 뚜렷하지 않은 이 어설픈 인생 앞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똑 부러지게 말했다.


나, 영화하고 싶어

  



필름 컴퍼니


역마살의 대명사인 내가, 아니 역마살의 화신인 내가 영화라는 것을 하다니...
아무런 지식도 장비도 없이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해서 연구하고 분석하고. 
그러다가 적금을 깨고 서울로 올라간 J. 비가 억쑤같이 퍼붓던 그날 밤, 우리가 아지트처럼 모이던 서면의 어느 술집에서 거나해지도록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주점 문이 열리고 그가 은색의 하드케이스와 함께 쫄딱 젖은 채 들어섰다.
"PD150" 
당시 가장 선호되던 중량 촬영 장비였고, 지금도 고이모셔 놓고 있는 명기.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한 13년 정도...^^
우리는 몇 편의 극영화와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찍다가 실패하거나 흐지부지 된 것들 몇 개와.
다들 결혼도 했고, 이제 애들 아비가 되었다. 그동안 경제적으로는 쭉 곤궁했지만, 제법 많은 후배들이 거쳐가기도 했고 보람과 재미도 있었다.
J는 몇 해 전 공장으로 갔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


어쩌다가 세 명이 모이게 되었을까?

"곡's"는 처음부터 여행업을 했다. 그는 우리 학교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성량으로 당시 부산의 대학 그룹내에서는 제법 유명한 가수였다.
컴퓨터를 전공해서 지금도 코딩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대학 졸업하고 여행쪽 웹 작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발을 들였다. 한마디로 잘 나갔다. 사업규모나 인원도 엄청났다. 그러다 쫄딱 망했다. 사장이 코딩에 빠져있는 동안, 자금이 줄줄 새고 있었단다.

감독이 꿈이지만 공장을 다니는 애 아빠.
다큐멘터리 찍는다고 전국을 떠다니지만 다큐멘터리보다 싸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하는 애 아빠.
무일푼으로 촉망받는 중견기업을 일구었다가 말아 먹고 이제 즐기는 삶에 눈을 뜬 애 아빠. 

정말 우연한 기회에 세 명이 만나게 되었다. 간만에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느끼는 나이의 무게감이나 인생에 대한 고민들에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좀 신이 났다. 

결론은 당연하지만, 남은 인생을 좀 더 재밌게 살자는 것.

서로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하다가 같이 할 수 있는 일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전거홀릭인 내가 자전거로 여행하고 싶다는 것에 곡's가 해 오던 일의 노하우가 보태져서 해외 자전거 캠핑 브랜드를 만들어보자는 것으로 잠정 합의가 되었다.


 



'바람타고' 어때?


그렇게 밑그림이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꽤 자주 만났다. 산행대장같이 현장 대응의 총괄적 책임은 내가 지는 것으로 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와 어떤 준비를 해야할 지에 대해 논의했다.
어느날 브랜드 네이밍을 하자고 모여서 내가 말했다.


바람타고 어때?


그 전에 "온세들"도 제안했지만 반응이 별로였다. 
우리말로 '온 세상의 들판'을 누비는 듯한 늬앙스도 있고 실제 'On Saddle'(안장 위에서)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잘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렵고 입에 안 붙는다더니 '바람타고'는 만장일치로 좋단다.

우리 세 사람의 마눌님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자, 이제 남은 건, 어설픈 중년들이 신나서 떠들던 걸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날카롭게 칼 질할 마눌님들의 허락을 맡는 것. 철없는 남정네들과 여태껏 살면서 어느 정도 우리들의 성향을 잘 아는 지라 크게 걱정되진 않았고, 각자 자기 마눌님한테 허락을 받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무진장 신나게 출발한 "바람타고"가 첫 원정지로 정한 곳은 '
대마도'

곡's는 홈페이지를 담당하고 숙소와 배편에 대한 제반 정리를,
J는 웹 코딩 보조와 디자인, 마케팅 및 모객 담당,
그리고 나는 현장 인솔을 맡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고치는 일은 늘 벌렁거린다. 이제 그러면 안되는 나이라는 것도 잊고 우리 마음은 벌써 대마도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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