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위 '상식'이라는 것에 얽매인다. '상식'은 그 자체로 지표이자, 기준이자, 목적이 된다. 현상의 정도를 파악하는 지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삶의 목적 등 상식은 인간의 삶에 천착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식'이라는 것이 과연 진실로 공고한 것일까?
'상식'의 공고함을 확인하기 이전에 먼저 '상식'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은 한자로 '常識'이라고 쓴다. '항상 상'자에 '알 식'자가 더해져서 '항상 알아야 하는 것, 혹은 항상 알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예시는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말하는 '상식'에 대한 정의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알고 있거나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이라고 명시해두었다. 즉,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서술과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필요 혹은 의무에 대한 서술이 합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적 정의에서는 '상식'의 범위를 지식에 한정하지 않고 있다.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등의 지적 능력 역시도 사전적 정의에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사전적 정의에서 제시하는 지적 능력들이 지식의 취득 및 학습에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지식을 바탕으로 한 활용능력에 적절한 능력이라는 점이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예문 또한 대다수가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를 지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즉, 사전에서 말하는 '상식'은 일반적, 정상적 등의 기준 혹은 지표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식'은 어떻게 해서 습득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흔히 두 가지의 방법을 통해서 축적된다. 하나는 귀납법이고, 다른 하나는 연역법이다. 귀납법이란 무수한 사례 등을 바탕으로 공통된 법칙을 찾아냄으로써 지식을 축적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백마리의 까마귀를 관찰하여 까마귀들이 공통적으로 까맣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지식을 얻어내는 것이다. 연역법은 이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을 전제로 하여 구체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까마귀는 까맣다. 저 알은 까마귀 알이다. 따라서 저 알에서 부화한 까마귀는 까말 것이다라고 추론해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쌓아온 지식은 크게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축적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가지 방법에는 큰 헛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일단 귀납법을 통해서 얻어진 지식은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사례를 통해 공통된 법칙을 찾아낸다고 할 지라도 그 법칙을 뒤집는데는 하나의 예외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백 마리의 까마귀를 조사했든 수천만 마리의 까마귀를 조사했든 그 결과 얻어진 '까마귀는 까맣다'는 명제는 까맣지 않은 까마귀가 한 마리라도 발견되는 순간 뒤집힌다. 연역법 역시도 전제를 귀납법을 통해서 얻어낸 지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귀납법과 같은 문제를 갖는다. 전제가 뒤집히면 연역의 결과 얻어낸 결론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상식 밖의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예외가 발생한 시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기준은 그 이전의 '상식'이며, 예외가 발생한 시점부터 그 '상식'은 이미 빛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식'을 놓아버리는 순간 세계를 인식하는 기준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디디고 있는 '상식'이라는 땅은 본질적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살얼음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식'에 맞게 판단하되, '상식'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